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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비명에 가까운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

④ 강간이 ‘작업’이라는 말로 대치되는 사회에서




강간이 ‘작
업’이라는 말로 대치되는 사회에서
비명에 가까운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④
<여성주의 저널 일다> 예지 


작업주(酒)와 최음제 사용 후기가 버젓이…

 

한창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의 에피소드 중에는 여자후배에게 술을 먹여 필름이 끊기면 모텔로 데리고 가는 것으로 ‘유명한’ 한 선배가 등장한다. 피해자는 여럿이지만 그는 전역 후에도 여전히 순탄한 학교생활을 즐긴다.

 

여주인공 또한 술자리에서 그가 따라주는 술잔을 비워내다 잔뜩 취기에 오른다. 그 선배의 부축을 받아 나갈 찰나, 이야기는 멋진 남주인공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는 빤한 전개로 흐른다. 방해(?)에 화가 난 선배가 “왜 작업 다 걸어 놓은 애를 보내냐”며 언성을 높이고, 남주인공은 “취업도 못하고 백수로 지내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고 응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채.

 

▶ tvN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3화 중에서

 

술에 취해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려운 여성을 모텔로 데려가 성관계를 가졌다면 이는 엄연한 강간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그 선배는 이를 ‘작업’ 쯤으로 여기며 도리어 남자주인공의 방해에 격분한다. 남자주인공 또한 선배의 범죄 행위를 지적하기보다 방탕한 행실이 부를 ‘앞날’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며 은근한 협박만 할 뿐이다. 게다가 여주인공은 어떻게 그려지는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남주인공이 잡아 준 택시에 오른다.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의 기획단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점 하나는,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섭취한 후 이뤄지는 성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술 또는 약물을 이용해 이뤄진 섹스는 명백한 성폭력이다. 그럼에도 술은 일상에서 연애나 잠자리를 갖기 위한 일종의 작업 수단, 혹은 둘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제 정도로 치부된다.

 

물론 술은 둘 사이를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이를 동반한 섹스의 즐거움도 존재한다. 중요한 건 술을 마시거나 섹스를 하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그 행동을 누가, 어떻게, 왜 했는가 하는 ‘맥락’이다. 상대가 모르는 사이 독한 술을 주문하거나 약물을 투여한 후 성관계를 갖는 행위가 내포하는 피해자의 경험은 소거된 채, ‘술은 유용한 작업 수단’이라는 가해자의 시선만이 우위를 획득하고 있다.

 

작업주(酒)로 여성을 유혹해 모텔로 데려갔다는 설이나, 성범죄 악용 우려가 있어 판매금지 품목으로 지정된 최음제의 구매 후기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실상은 ‘강간’이 ‘작업’이라는 어휘로 대치되는 그릇된 낯면을 보여준다.

 

완전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 ‘합의’한 것이다?

 

현실과 이 드라마의 차이가 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를 법정에 서게 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이 더욱 참혹해질 수 있는 때는 그 이후다. 법정에서 피고 측과 원고 측은 하나의 진실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진실을 다툰다.

 

여기서 법은 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법은 진실을 찾아내거나, 또는 그것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스스로 진실이 되어 군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법이 공명정대하고 치우침 없기를 기대하지만, 절대적으로 보이는 법 역시 이를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와 역사적 산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건을 두고 내려지는 판결은 사회의 담론과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이를 둘러싼 여러 해석들을 보면 사회적 산물로서 법의 맹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법원은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를 “상대방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보는 최협의설 입장을 취하고 있다. 때문에 사건의 초점은 피해자의 반항 가능성 여부로 쏠린다. 즉 고소인은 당시 저항을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불가능했는지) 혹은 얼마나 열심히 저항했는지 입증해서 이를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피해자’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술과 약물 등으로 저항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행은 형법 제299조에 의해 처벌할 수 있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 추행한 자는 준강간, 준강제추행에 해당한다. 하지만 심신상실과 항거불능의 기준은 명확치 않다. 이에 따라 법정의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근거한 오류를 갖기 쉽다. 강간죄 판단의 근거로 고소인이 저항의 수준을 입증해야 하듯이, 준강간은 자신의 항거불능 상태를 증거로 보여야 하며, 재판부의 해석에 따라 비슷한 사건도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다. 이는 법조항이 명확한 판단의 근거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동아일보 <“지적장애인이 성관계 거부 안했어도 항거불능 상태” 인정> 2011년 11월 6일자 기사 중에서

 

위의 표는 동아일보에서 2011년 11월 6일 보도한 <“지적장애인이 성관계 거부 안했어도 항거불능 상태” 인정> 기사 중 일부이다. 일명 도가니 사건으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13세) 성폭행 사건과,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지적장애인(15세) 성폭행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비교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두 사건은 지적장애인의 ‘항거불능’ 상태에 대한 법원의 해석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각종 정황과 증거가 오가는 법정에서 고소인과 피고인은 결국 ‘그 성관계’가 ‘합의’에 근거했는가를 두고 공방한다. 그런데 위의 두 조항은 피해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저항했는지, 혹은 얼마나 미약한 상태였는지 증명함으로써 ‘합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만든다. 강간이 상호 간의 동의를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고, 성관계가 일어난 방식(폭행이나 협박 또는 항거불능, 심신상실 상태)을 통해 결정되는 구조다.

 

이러한 실정법 하에서는 인지부조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나 직업, 성적 취향, 심지어 술에 취했을 때 걸음걸이까지 사건 자체와 동떨어진 부수적 요소들이 유죄냐 무죄냐 결정의 근거로 작용한다. 완전한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곧 성관계에 대한 합의라고 판단되는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동의’가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동의한 섹스’가 아닌 성관계는 전부 강간이다

 

미국의 경우 1970년까지는 성폭력 피해자가 모든 육체적 힘을 다해 가해자와 싸우는 ‘극도의 저항’(utmost resistance)을 했을 때만 강간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강간죄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1974년 미시간 주를 시작으로 대다수 주의 형법이 저항 요건을 폐지했다.(조선일보, “죽을 힘 다해 반항하라 아니면 Yes?” 2011년 1월 8일자 기사 참조)

 

또 1992년 뉴저지주 대법원 판결에서는 ‘성행위에 대하여 피해자가 긍정적으로, 자유로이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성적 삽입은 성폭행을 구성한다’라며 동의 없이 이뤄진 성행위는 곧 성폭력이라는 입장을 관철시켰다.(동아일보, “성폭력 편견과 진실” 2014년 11월 11일자 기사 참조)

 

캐나다 역시 형법 265조를 통해 상대의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행위 및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제력을 행사해 일어난 성행위는 모두 범죄에 해당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피해자의 ‘동의’ 의미를 두고 해석상 논란이 제기될 수 있다. 형법은 다음의 266조에서 동의 요건에 속하지 않는 사항을 특정하고 있다. 가령, 협박 혹은 두려움을 느꼈거나 권력 행사로 쉽게 저항하지 못했을 때는 실질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보지 않는 방식이다.

 

‘동의’ 여부가 강간죄 성립 요건이 되면, 술이나 약물 섭취 후 발생한 성관계에서 강간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피해자의 항거불능 정도’가 될 수 없다. 모든 증거와 정황은 ‘피해자가 동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상호 간 명확한 동의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근거로 재구성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미권 국가 간 형법의 차이는 곧 ‘무엇이 강간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으로 귀결된다. 후자에서 강간이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모든 성관계’를 뜻한다면, 우리 사회는 ‘폭행과 협박, 항거불능과 심신상실 상태에서 이뤄지는 성관계’를 강간이라고 분류한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현실 속의 무수한 고통들은 법 테두리 밖 개인의 몫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강간에 속하는 행위들을 법조문에 계속 추가한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들 삶의 결은 법조항 몇 줄보다 훨씬 세밀하고 불완전한 까닭이다. 법이 제시하는 ‘몇몇 행위’만이 강간에 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저마다 다른 개인의 고통을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법의 안전망으로 포섭시키기 위해서는 강간에 해당하는 요건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강간이 아닌 것, 즉 명백한 동의에 기반한 성관계의 의미를 구체화해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이 강간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확실히 ‘내가 동의한 섹스’라 답한다면, 이를 제외한 성행위가 곧 강간이다. 바뀌어야 하는 건 #그건_강간입니다 라는 외침의 토대를 이루는 ‘강간의 정의’ 그 자체다.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 기획단이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총 6회에 걸쳐 기사를 연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