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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터 85호 <생존자의 목소리③> 이 세상의 별빛이 될 모두에게 - 별 본문

성폭력에 대해서/[나눔터] 생존자의 목소리

나눔터 85호 <생존자의 목소리③> 이 세상의 별빛이 될 모두에게 - 별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2020. 9. 1. 16:01

이 세상의 별빛이 될 모두에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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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신문에도 전재되었습니다. ☞ [여성신문에서 보기]

 

오늘은 상담을 시작하고 7개월 만에 처음으로 큰 발전이 있었던 날이다. 이야기하다가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항상 눈물이 없는 나, 너무 씩씩한 나, “나는 괜찮은데”가 입에 붙었던 나였는데. 드디어 선생님과 이야기하는데 눈물이 나서 너무 당황스러웠다. “선생님, 제 친구들은 모두 직장도 다니고,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취미활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너무나 다들 바쁘게 멋지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저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왜 직장도 못 다니고, 약 먹지 않으면 밖에도 제대로 못 나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고… 시간은 흐르는데 아무것도 성취를 이룬 것이 없네요.”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성폭력이란 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왜 하필 나여야 했을까. 왜 나에게 일어났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멋진 직장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만나서 술도 한잔 하고, 기분 좋게 내가 술값을 내기도 하고, 연휴에는 동남아 여행도 가고, 퇴근 후에는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하면서 즐겁게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요?”

 

“왜 내 잘못도 아닌 성폭력을 당해서, 난 지금 이렇게 젊은 나이에 시간을 허비하고 보내고 있을까요? 선생님은 항상 저 스스로에게 쉬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본인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줘야 한다고 하시지만 저는 그게 잘 안되네요. 겉으로는 ‘쉬고’ 있는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낭비하고 있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보내려고 저는 그동안 많은 시도를 해왔어요.”

 

“선생님, 저는요. 청년연설대전에 2번이나 나가서 저의 성폭력 피해경험을 밝히고 대중의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요. 이대로 계속되는 경력 단절이 두려워서 청년 창업 경진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고요. 토론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어요. 최근에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고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유튜브도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유튜브는 실적이 저조하고 너무 큰 에너지가 들어가다 보니 좀 벅차서, 이제 글을 써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 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찌 보면, 참 열심히 살고 있죠? 그런데요, 이렇게 성폭력 피해 이후의 망가진 저의 삶 속에서 그 허무하게 흘러가는 피해의 시간들을 어떻게든 생산적으로 사용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제 자신이 불쌍해요.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요. 내 성폭력 피해를 기록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라도 해서 뭔가 사회 운동을 하려는 내 자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사실은 내 피해 속에서 허덕이면서 나 스스로도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너무 채찍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요.”


선생님께 일방적으로 내가 할말을 죽 늘어놓으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웃으면서 축하를 건네주셨다. “별이씨랑 7개월을 상담하면서 눈물 흘리는 모습 처음 봐요. 별이씨는 항상 감정도 없고, 맨날 괜찮다는 말만 입버릇처럼 하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내가 불쌍하다, 힘들다,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는 치료사로서 오늘 별이씨가 한 걸음 발전한 것에 대해서 축하해야 할 것 같아요.”


성폭력 피해 이후 나의 일상은, 나의 시간은, 마치 손에 잡은 한 줌의 모래 같다. 너무 힘없이, 손가락 사이를 숭숭 빠져나가 버린다. 아무리 다시 움켜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를 맥없이 흘러 나간다. 임신 출산 육아도 아니고, 군대를 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핑계거리도 없이 남들에게 대놓고 말 할 수도 없는 성폭력 피해라는 이유로, 졸지에 경력단절, 백수가 된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이겨낼 것이다. 아무리 가해자와 이 세상이 나에게 가혹해도 난 이 깊고 깊은 심연의 바닥을 찍고 올라올 것이다. 너무 힘들 땐 아이처럼 눈물도 펑펑 흘리고, 그래도 너무너무 힘들 땐 소주도 한잔 하면서 누가 뭐래도 난 꿋꿋이 버텨낼 것이다.

 

선생님께서 또 그러셨다. “별이씨가 지금까지 고생한 것에서 헛된 거, 버릴 거 하나도 없어요. 고생 많았어요.”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이 나를 찌르고, 아프게 하고, 죽고 싶게 만들지라도, 그래, 버릴 거 하나 없다. 시간을 되돌린 대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 난 맞서 싸울 것이다. 그 덕분에 난 강해졌으니까. 어느 날 신이 내려와서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을 때로 되돌려준다고 해도, 나는 되돌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 아픔과 고통과 슬픔은 누군가에게 생명의 희망이 될 것이다. 내 이름처럼,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작은 별 빛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별 빛이 될 나에게 백수생활 쯤이야. (라고 혼자 되뇌이며 힘을 내본다).

 

©ESA/Hub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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