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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 상담소/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인터뷰

12월 활동가 인터뷰: 셀프 인터뷰 2

두달만에 돌아온 활동가 인터뷰, 대망의 마지막입니다. 12월 활동가 인터뷰!
이번에는 특별히 인터뷰를 기획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활동가 인터뷰를 기획했는지 궁금한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내일 9시에 3편으로 만나요!

 

 

인터뷰어/인터뷰이: 닻별(), 세린(세), 승은(승)

 

Q3. 최근에 많이 곱씹게 되는 단어

: 진부하게, 코로나.

: 코로나의 어떤 지점들이요?

: 고립되는 점. 최근에 할머니가 저희 집에 오셔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됐어요. 저희는 스마트폰으로 여러 사람들과 쉽게 연결되고, 그냥 핸드폰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금방 가는데 할머니는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으세요. 코로나 전에는 교회에 자주 나가셨는데 요새는 교회도 나갈 수 없고, 혼자 집에 계시면 무료하실 거 같더라고요. 앞으로도 코로나가 계속될 전망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코로나 속의 고독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지금의 상황을 더 이상 한시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말 진짜 싫어했거든요. 근데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 맞아요. 코로나 시대의 000. 이런 거 진짜 싫어했는데. 이제 어쩔 수 없다.(웃음)

 

: 저는 코로나 이전의 활동이 어땠는지를 알잖아요. 그래서 행동의 제약이 너무 많다는 걸 느껴요.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집단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면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온라인 시대에 적응하기 같은. 상담소가 가장 어려워 하는 영역도 ‘온라인 시대에 적응하기’, ‘온라인으로의 연결감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다룰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후원이라는 채널로 상담소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 그리고 상담소의 잠재적 지지자들을 홍보라는 채널로 온라인을 통해서 만나는 일이 제 업무라서, 참 고민이 많습니다.

 

상담소가 잘 하고 익숙한 방식의 운동은 이런 거예요. 기자회견을 열고, 집회를 기획해서 열고, 국회에 압박을 넣고, 상담소와 비슷한 톤의 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단체들을 연결하는 일. 다른 여성단체일 수도 있고, 변호사회일 수도 있고, 다른 페미니즘 액션 집단일 수도 있고, 교수 집단, 학자 집단일 수도 있고. 이런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서 사회이슈로 제시하는 방식에 익숙해요. 근데 지금은 전통적인 매체가 예전만큼의 파급력을 갖는 시대도 아니고, 개인 채널들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를 맞이한 거죠.

 

의제강간 연령 상한 이후, 다양한 동의의 맥락을 짚었던 상담소 온라인 토론회 <16세 미만의 동의>.    (클릭 시 자료집 pdf 다운로드 링크로 이동)

: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의 상담소는 어땠을지 궁금해요.

: 지금 같은 상황이었으면 아마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당시 ‘낙태죄’ 정부입법예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논의되고 있었음.) 활동가들이 답답해 하는 게 그런 부분이에요. 정책 입안자들은 저희가 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액션이 잘 통해요. 국회의사당에 앉아 있는 보수적인 사람들한테는요. (웃음) 그런데 우리 운동을 함께 해줄 시민들은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사무국 활동가들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온라인 시대가 내년, 내후년에도 이어질 수 있고 어쩌면 장기화돼서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 이 시대에 상담소는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Q4. 지금의 나를 만든 특징적인 장면

: 이 질문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 주요한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냐와도 연결되어 있네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이 주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살아오면서 어떤 식의 균열을 경험하고, 그것을 설명하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 같아요. 이를테면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학교라는 환경이 억압적이라는 감각은 모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입시라는 게 많은 사람들에게 열패감과 자기 소모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은. 그때 느낀 부조리함이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면을 더 유심히 쳐다보게 만들었어요. 

 

: 승은님 말 들으면서 생각난 건데, 저는 지금은 학교가 되게 폭력적인 공간이라는 데에 공감을 하는데, 그 당시엔 거의 못 느꼈던 거 같아요. 저는 학교에 가면 너무 좋았던 거예요. 집이 아니니까. 학교 선생님들은 권위적인 사람이 있긴 해도, 폭력적으로 행동하면 애들이 다 '저 선생님 또 저런다.' 이런 반응을 하니까, 저 사람이 이상하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진짜 이상한 선생님들 많죠.

 

: 영화 <벌새>를 너무 좋게 봤는데 은희가 되게 다양한 일들을 겪잖아요. 집에서의 차별이나 폭력도 있고, 학교에서는 서울대를 가겠다는 말을 복창시키고 몇몇 아이들을 날라리로 낙인찍기도 하지만, 그런 폭력을 그저 보여준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은희가 가진 회복력을 보여준다는 점이었어요. 은희는 자기보고 이상하다고 하는 가족들한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기도 하고, 지숙이랑 싸우고 또 화해하고, 남자친구나 유리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하고. 이런 식으로 분명히 폭력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서 은희는 다시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치유해나가요. 그 영화를 보고 한동안 잊고 있던 옛날 생각이 나면서 ‘나 역시도 혹은 모두가 이곳저곳을 부단히 돌아다니면서 생생하게 살았구나’ 하고 재인식하게 했던 영화였어요. 우리가 계속 부정적인 경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 같아서. (웃음)

 

: 맞아요. 그 영화의 한 부분만 딱 떼어서 보면 은희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는데 전체를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잖아요. 그게 진짜 대단한 거 같아요.

 

은희가 겪는 폭력과 회복의 이야기, <벌새>.

 

: 저를 만든 특징적 장면. 무거운 얘기와 가벼운 얘기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무거운 얘기는 처음 정신과를 찾아갔던 날이 기억나요. 되게 영세한 곳이었는데, 병원 같지가 않았어요. 낡은 소파가 있고, 문도 가정집 문 같이 생겼고, 들어갈 때 딸랑 소리가 나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면서 이 순간이 내 삶을 크게 결정짓는 건가? 그런 생각도 했던 거 같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병이 혐오 단어로, 비하적인 언어로 많이 쓰이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병원에서 나왔는데 아직도 세상은 똑같고, 그런 것들이 되게 이상하게 느껴졌던 순간이 기억나요.

 

또 어릴 때 생각이 나는데, 그런 거 있잖아요 다들. 자기의 전설 같은 어린 시절 에피소드. 몇 달만에 말을 했다는 식의, 단군 신화 같은.(웃음) 저는 어릴 때 세계 어린이 문학전집처럼 얇은 동화책들을 쭉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책을 한 권씩 엉덩이에서 빼서 읽고, 다 읽으면 옆에다 쌓았대요. 그러다 새로 쌓은 책 더미가 더 높아지면 그쪽으로 옮겨 앉아서 마저 읽고. 그걸 책 더미가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쌓일 때까지 했대요. 나중에는 책에서 오타를 찾아서 엄마에게 갖다 줬다는 그런 얘기가 기억에 남아요. 그 때보다는 독서를 덜 하는 거 같아서, 열심히 해 봐야죠.

 

: 저도 세린 님이랑 되게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얘는 책만 씹어먹고 살 애’라는 말을 항상 들을 정도로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 다니는 어린이였어요. 그렇게 책들을 읽어대서 인지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설명되지 않는 부조리가 있으면 이게 왜인지를 알아야 직성이 풀려요. 그리고 그게 내 언어가 될 때까지 무의식 중이든 의식 중이든 계속 곱씹어요. 

 

무거운 얘기로 두 가지 장면이 생각나는데, 첫 번째는 학벌사회, 입시경쟁의 장면이에요. 제가 살던 동네가 대표적인 학원가가 있는 대치동과도 가깝고 해서 소위 말하는 ‘강남’처럼 내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두세 군데쯤 다녔는데, 학교 마치고 학원 버스를 타고 학원에 도착해서 내리니까 저랑 비슷한 어린이들을 태운 버스가 8차선 도로에 일렬로 서있는 거예요. 본격적으로 중학교 입시를 시작하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는 학원이 10시에 끝나면 제 또래부터 시작해서 고3, N수생까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저처럼 피곤하고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나오는 장면이 되게 강렬하게 남아있거든요. 그 장면이 제 고향의 적나라한 욕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고요. 저는 그런 일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고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두 번째는 공감받았던 기억이에요. 광우병 집회가 한창이던 당시에(2008년) 제 주변에 사회문제에 관심 많은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근데 그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잖아요. 시위 현장에서 사람에게 물대포를 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온갖 언론에서 대서특필 되었고요.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광우병 집회를 통해서 알았어요. 가까운 곳에서도 공감을 받았고요. 살수차가 물대포를 쏘는 장면 자체는 굉장히 부조리하지만 저에게는 이해받은 특징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같은 시기, 광우병 촛불시위에 참여한 상담소 활동가들. (2008)

 

: 그 때부터 NGO 활동가를 꿈꾸신 건가요?

: 꼭 활동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대학교 원서를 쓸 때 뭔지도 잘 모르면서 ‘여성학을 공부해서 여성단체 활동가가 되어야지!’ 라고 했는데, 진짜로 여성단체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재미있네요.

 


12월 인터뷰는 내일 마지막 편이 업로드됩니다. 

자원활동가 세린, 승은님과 상담소의 만남과 상담소의 '사람'들이 궁금한 분들이라면 끝까지 놓치지 마세요.

그럼, 내일 저녁 9시에 만나요!

 

기획/편집 :  닻별, 세린, 승은

녹취록 작성 : 세린, 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