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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이제 시작하는 우리, 현장에서 만나요" - 31기 성폭력전문상담원 기본교육 후기

202175일 월요일부터 727일 화요일까지 17일 동안 매일 6시간씩 성폭력전문상담원 기본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겠다. 먼저 여성인권 및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와 여성주의 인식론을 시작으로 기본적인 개념들과 법·제도·지원체계들에 대해 배웠다. 다음으로는 여성주의 상담운동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주체들과 관련된 이야기들과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끝으로는 심리 치유, 여성주의 상담, 자기방어 훈련 등 상담의 원리와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직접 다양한 활동들도 할 수 있었다. 각자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법원에 방문하여 성폭력 관련 재판을 참관했고, 영화 <잔인한 나의, >을 보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액션 공폐단단활동가들에게서 친족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 사건지원자의 태도와 역할을 학습한 후 두 차례의 상담 실습도 해볼 수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다양하고 많은 논의들을 접했다.

 

기본교육 수료증과 상담소 굿즈 인증샷!

너울거리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성폭력 피해생존자로서, 교육을 받는 동안 온갖 감정이 들었다. 어떤 단어들과 말들은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성폭력, 삽입, 정액, 강간, 모텔, 술 등의 단어는 계속해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현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너무나 중립적인 말들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불쾌하고 괴로웠다. 성폭력 법을 배울 때는 지금이라도 가해자에게 콩밥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러다가도 가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판례들과 법조문들을 마주하면 좌절감과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10시부터 17시까지 교육을 들은 후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도 많았다. 몇 날 며칠 동안 밤마다 악몽을 꿨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성폭력 가해를 했던 가해자와 비슷한 체구와 나이대의 남자가 내 위에서 성행위를 하고 있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았고 멍했다.

 

또 어떤 날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자전적인 소설로 풀어낸 소설가이자 반성폭력 활동가인 위니 리(Winnie M. Li)“Life does get better(삶은 정말로 더 좋아져요).”라고 말한 영상을 강사분께서 보여주셨는데, 그날 교육이 끝나고서는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삶을 살아내고 있는 피해생존자에게서 듣는 생기 넘치는 말만큼 상처를 아물게 하고 힘을 주는 말은 없었다. 자기방어훈련 강의를 듣고 나서는 내 몸을 움직이고, 걷고, 달리고, 팔다리를 쭉쭉 뻗어보고 싶어졌다. 아주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폭력을 막아내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여성주의 상담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배우고 나서는 여성주의 상담과 사랑에 빠졌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참고문헌에 있는 온갖 논문들과 보고서들을 다운받았고, 책들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덕분에 내 알라딘 장바구니에는 181만 원어치의 102권의 책이 담기고 말았다.

 

일상을 살아가느라 꾹꾹 눌러두고 숨겨두었던 트라우마들이 기억의 상자를 부수고 뛰쳐나와 나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느껴질 때면 내가 정말 좋은 상담활동가가 될 수 있을지, 내게 상담운동을 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고 수시로 불안해졌다. 삽입이라는 소리를 듣든 강간이라는 소리를 듣든 아무런 동요 없이 마음이 차분하고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피해 이전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교육을 들으면서 점점 마음에 힘이 뿅 솟아나고 눈물이 핑 도는 그런 순간들이 하나둘씩 늘어갔고, “Life does get better”이라는 말이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단 하나의 희망처럼 내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마음에는 의심이 아닌 확신이 몽글몽글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나누어주는 동료들의 말을 들으면서는 이들과 함께 힘을 내서 상담활동가로서 살아가겠다는 포부가 점점 커졌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 현장에서 만나요

 

여러 선생님들의 강의도 정말 알차고 뜻깊었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함께 강의를 듣는 31기 동료들도 정말 소중했다. 그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에서 아주 섬세하고 중요한 고민들과 질문들을 나누어주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동료와는 법원에서 만나 서로 안아주고 앞으로 함께 여러 활동들을 해나가기로 했다. 두 번의 상담 실습에서는 여러 가상의 사례들을 두고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온라인 수료식에서 각자 한 마디씩 하는 시간에 나는 여성주의 상담운동에 대해 함께 배운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정말 정말 진심이었다. 우리 31기 동료들을 꼭 현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마구마구 들었다. 앞으로 31기 동료들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현장에서 만날 많은 활동가들, 내담자들과도 동료로서 함께 연대의 에너지를 나누고 싶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에서 권김현영 선생님은 "나에게 페미니스트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사람, 알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 올바름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를 질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교육을 받기 전에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어떤 느낌과 무슨 의미의 말인지 알 것도 같다. 알 것도 같다는 거지, 안다는 건 아니다. 이제 막 교육을 수료했으니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상태다. 아마 평생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까?

 

갈 길이 멀다. 오래오래 걸어갈 길 위, 그 시작점에 섰다. ‘이제 시작이라는 말은 부담이 될 때가 많지만, 여성주의 상담운동을 하는 상담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선 이 길의 시작점은 왠지 싫지 않다. 청취자, 조력자, 연계자, 연구자, 활동가로서 배울 것도 많고 겪을 것도 많겠지만 이 길을 걸어갈수록 그것들에 압도되지 않고 되려 더욱더 자유로워질 앞으로의 시간들이 기대된다.

 

이제 시작하는 우리, 현장에서 만나요.

 

 

 

-이 글은 31기 성폭력전문상담원기본교육 수강생 오유진님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