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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차별을 끊고 평등을 잇는 2022인 릴레이 단식행동 평등한끼 <평등 없는 국회에 한 끼 대신 한 마디!>

2022인 릴레이 단식행동 '평등한끼'가 3월 14일 시작되었습니다. 단식행동의 일환으로 국회 앞에서 월~금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집회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3월 17일(목)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주관으로 <평등 없는 국회에 한 끼 대신 한 마디!> 집회를 열었습니다. 대선을 지나며 '성평등'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지 확인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 출범 전에 완수해야 할 행동 과제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성평등 외면하는 국회에, 차별금지법 안 만드는 국회에, 내 삶을 외면하는 정치에 한 마디 하자는 것이 이번 집회의 취지였습니다.

 

먼저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발언을 듣다보니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 우리의 삶과 이야기가 증거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언문을 현장 사진과 함께 공유합니다.

 

발언1. 성폭력피해생존자/유랑 활동가 대독

혐오를 지켜보는 국회에 한 마디

2022년 대선은 혐오의 정치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20대 여성 유권자로서, 제가 지지하는 후보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이상향에 대한 열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혐오로 가득한 사회가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3월 9일 제 바람과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제 또래의 많은 청년이 여성가족부는 없어져야 한다고 외칩니다. 여성가족부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또 불평등을 조장한다고 합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지워버린 채, ‘여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비난합니다.

이에 저는 더욱 두렵습니다. 저는 20대 여성이지만 동시에 성범죄 피해 생존자입니다. 가해자와 싸우는 동안 수많은 혐오의 질타를 받았습니다. 여성가족부의 지원 아래 저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성평등은 남성의 인권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존엄도 짓밟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페미니즘은 정치적 전략으로 사용되었고, 구조적 성차별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별 갈라치기를 통해 많은 지지를 얻은 당선인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의 5년이 너무나도 절망스럽습니다. 다음 정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차별 금지법 제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 누구도 사회적 합의 이후에나, 나중에 가서야 인정받을 존재가 아닙니다.

종종 법은 사람의 인식보다 앞섭니다. 주 5일제가 그러했고, 호주제 폐지가 그러했습니다. 당시에도 반발은 있었습니다.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기업이 도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과연 그랬던가요? 우리가 사회적 합의를 보고 난 다음 법을 만든다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선거도 끝났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 5년이 혐오로 점철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주십시오.

 

발언3. 하윤 상담소 자원활동가

 

저는 오늘 한국사회에 뿌리깊게박혀있는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반역자로서 이자리에서 섰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여러 항목들중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본인이 소수자성을 가지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없기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자리에서 특히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에 대한 의견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고백 하고자 합니다.

현재 제 정체성은 친족성폭력을 알리고 해결하고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아동기 친부 성폭력의 피해당사자입니다. 이상가족의 신화를 깰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피해경험을 20년간 침묵하고 살아왔습니다. 아동기부터 지금까지 가족구성원들과의 갈등속에서 방황하는 저를 보며,주변에서는 제 가정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저의 무조건적인 희생정신에 살림밑천 큰딸인 효녀라던가 또는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고 이기적인 여성이라는 극단적인 두 가지의 프레임으로 쉽게 결론지어버렸습니다. 

외부에서 보이는 저는 예쁨만 받고 양육과 보호를 받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랑이 많은 이상가족의 여성 구성원 일 것 입니다.어쩌면 저 조차도 그런 삶을 동경하며 치열하게 가짜의 모습을 연기해왔습니다. 그래서 단 한번도 제 자신으로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매일 먹고 자고 숨쉬는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제대로 생존할 없는 환경을 만든 가부장과 그 폭력에 순종하라고 세뇌한 가부장의 원가족들로 인해 어린시절동안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10대 시절부터는 매일 자기비하와 사투를 벌이며 스스로를 더럽고 가치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내면으로는 제 자신을 혐오했습니다.제 정체성 자체를 의심했기때문에 제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제가 가해자로부터 배운 자기비하와 스스로에 대한 학대때문에 타인과의 관계 맺는 것, 인간과 내 자신에 대해 신뢰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조차 없습니다. 어른이 되어 우연히 읽게된 아동학대에 관한 책에서 제가 온갖 종류의 아동학대를 모두 경험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 후, 제가 겪은 인생이 실제 인생이 아닌 ..제가 꿈꿔왔었던 가짜 인생을 상상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아보면 그 지옥같았던 시간들을 어떻게 참아냈는지 이해도 가지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 영상으로 보시는 분들의 삶이 하나의 역할만을 수행하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시겠죠. 우리에게는 다양한 역할이 있고 또 그런 본인의 다양함을 수용하고 주체적이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불운한 피해자만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성별, 한국사회의 가족 구성원으로써 마치 제 자신을 자꾸 정당화하고 설명해야할만 할 것같은 의무감에 짓눌립니다. 한국사회에서 가부장에 대항하고, 이상가족 신화를 무너뜨리는, 가족해체를 주장하는 이 결심을 공개적으로 밝히기까지 근 3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1-2인 가구가 한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가구임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만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고 자식을 낳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정해진 숙명인양 세뇌시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아동기때부터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온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의 삶은 배제되어 집니다. 놀랍게도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은 늘 우리주변에 있었습니다. 경악할만하게 끔찍해서 불쌍해서 숨어버리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제 불행했던 과거가 한낯개인의 역사로 전시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혼을 하게되면 정상의 삶에서 밀려나버릴 것 같아 아내폭력을 인내하는 어머니를 지켜 보며, 가정에서 사회화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피해를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더 큰2차피해와 노출되어 다시 피해를 어른들로부터 경험한, 그래서 아동학대를 무차별적으로 당하면서도 어른들에게 제대로 구조의 신호를 보내기 어려웠던, 그런 제 자신을 혐오했던  저의 무고했던 어린시절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실수로 부터 배우고 성장합니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혐오와 차별을 말하고 있을 당신께, 이제부터 혐오앞에서 혐오로 대응하지 않겠습니다. 혐오앞에 용기로 응답하겠습니다. 차이를 인정할때 차별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각각의 매력을 지닌 소중한 존재입니다. 혐오와 차별을 멈추기를 노력할 때, 우리는 좀 더 다양하고 열린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책임과 존중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안전하지 않은 가족에게는 해체를 명합니다. 혈연중심주의, 가족중심주의의 대한민국에서 저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역기능가족의 해체를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부속물이 아닌 개개인으로서의  온전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이제 세상은 본인이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스스로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하는 때가 왔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족과의 공존은 무의미하며 우리를 병들게할 뿐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을 꿈꾸고 싶습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가족중심주의를 해체하라! 친족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는 성, 가족형태와 상황 등에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을 시급히 재정하라! 이상입니다.

 

발언4. 푸른나비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공폐단단’ 활동가

친족 성폭력 생존자를 외면하는 국가의 가부장제를 고발하며
평등을 외칩니다. 부모 모두를 가해자라 고발해서 행복한 푸른나비입니다. 저는 아동 친족 성폭력 생존자라 스스로 말합니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피해자로서의 불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외면과 소외를 벗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국민의 권리와 한 사람의 인권으로 외치고자 합니다.

친족성폭력에 대하여
제가 겪은 일을 잊어야 할 불행한 개인사라 여겼는데 그것이 가해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사고도 아니고 천재지변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성범죄”입니다. 성범죄는 강자가 힘을 악용하여 약자에게 저지르는 범법행위입니다. 2020년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전체 성폭력 상담 건 중 피해자의 93.6%는 여성이었으며 가해자의 93.1%는 남성입니다.이렇게 성범죄에 대한 통계를 보더라도 과연 국가와 사회는 차별이 없이 평등한가요?

성범죄를 겪지 않으려면 어두운 밤길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무수한 여성들은 그렇게 밤길을 두려워하고 범죄를 당하면 자신을 탓했습니다. 그에 비해 남성은 자유로왔습니다. 어린아이였던 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골목길을 지나, 돌아가는 그 집을 오히려 더 무서워했습니다. 사회나 국가는 가족과 가정이, 피가 흐르듯 애정을 주고 받는 양육의 장이라 말하는데, 그 안에서 성폭력을 겪었습니다. 아이는 그 일이 무엇인지 지칭할 언어가 없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압박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말을 하면 가족이 다 무너진다 했습니다. 가해자는 온 가족이 알고 있음에도 범죄를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런 제재나 변화가 없었기에 오랜 세월 그 행위를 지속했습니다. 가족이 생명을 보호하고 신성하다 했으나 그 안에는 힘이 있는 자가 권력을 누렸고 범죄자도 있었습니다.

생존자와 그 연대자들에게
이러한 부조리를 말하기 위해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은 함께 연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때론 자신의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프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하는데 과연 누가 우리를 알아줄까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듯, 너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고 함께 할 아픔이기에 바꾸고 변화할 수 있다고 내밀고 맞잡은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가해자들과 살던 집이 아니라, 말하고 고발할 수 있는 이 자리가 차라리 제게는 가장 안전한 장소입니다. 말하는 생존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 가족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며 손을 잡았습니다. 먼저 앞서서 친족 성폭력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고 변화를 요구한 선배들, 그 멋진 사람들에게 이 글로 생존자들의 마음을 전합니다.

국가는 대답하라
이제는 국가가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폭력 통계가 있어도, 알면서도 불행한 개인 서사로 치부하던 친족 성폭력에 대해 즉시 아래와 같이 조치해 주십시오. 우선 손톱 밑 가시를 빼는 것처럼 가족 내 범죄자인 가해자를 축출해 주십시오. 가해자가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고 아무리 사회구성원으로 훌륭해도 성범죄자라면 그것에 마땅한 벌을 받고 피해자에게 보상도 해야 합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에게는 가시가 빠져 그 이상 곪지 않는 진정한 가족을 구조화하여 가부장제를 대체할 제도도 요구합니다.

생존자들에게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에 의무를 다하면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생존자는 살아있는 것 자체로 이미 그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미약한 법적 제도와 사회 인식 아래에서 너무도 잘 버텨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회에서 더 자유롭게 살아야 할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한때, 저는 어떻게 이런 일을 겪고도 살고 싶으냐 자책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생존자는 고통 이상으로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하기를 시작하면서 죽음보다 강한 생존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자아에 대해 얼마나 강한 힘이 있는지도 깨달았습니다.

모든 성범죄 생존자들에게도 경외와 존경을 보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말하기를 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이 사회와 국가, 또한 바뀌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 예고합니다. 우리가 길을 내어 함께 갈 것을 선언합니다!!

 

발언5. 장채원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

 

오랫동안 우리는 지켜보았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하는 여성, 남편이나 아버지가 죽인 아내나 딸이나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 한 귀퉁이에 단신으로 보도되거나 방송에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되는 것을. 각각의 사건이 마치 독립적인 사건인 양, 이름 붙여 호명할 가치가 있는 더 큰 현상의 일부가 아닌 양 취급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이 다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차별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차별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폭력과 차별은 예외적인 것, 일상의 여느 원칙과 관습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폭력의 사례 하나하나가 수수께끼 같고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여겨질 뿐, 그 모두가 이 사회와 오래된 불평등들의 구조에 깊이 엮여든 한가지 패턴의 일부라는 이해는 공유되지 않습니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그 흩어진 불평등의 점들을 잇는 시작입니다. 현행 제도의 망에 걸리는 ‘차별’로는 실제 삶의 경험을 모두 설명할 수 없습니다. 특히 법제화된 '성차별‘에 포괄되지 않는 현실의 맥락은 너무 다양하기에, 우리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고, ‘불편함’, ‘어려움’이라는 단어로만 제한적으로 말하고, 써 왔습니다.

‘성차별’ 하나만 가지고 설명하기 어려운 차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합니다. 우리는 갑 또는 을이며 내국인이거나 외국인이고 젊거나 늙거나 어리고, 장애인이거나 언제든 장애를 갖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교육받을 기회가 충분했고 누군가에겐 그 기회가 없었습니다. 성별로만 차별이, 피해가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구조에서 차별금지법은 ‘성차별’의 의미를 확장시켜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설명력을 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1969년에 만들어져 널리 인용된 페미니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을 두고 페미니스트 활동가 앤 스니토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라고요.

지금, 여기, 차별금지법으로 반성폭력 운동이 더 커지고 확장되는 시대를 맞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발언6 닻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한국성폭력상담소 경진 활동가 대독

 

동의여부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을 유보하는 국회에게 한 마디

안녕하세요, 한국성폭력상담소 닻별 활동가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제일 많이 받은 연락은 "너… 괜찮아? 과로하는거 아니야?" 였습니다. 친구들에게 별안간 과로 걱정을 듣게된 건 제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가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데 차별과 불평등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공약이 여성가족부 폐지이기 때문에, 저는 친구들의 우려섞인 걱정을 듣는 요즘을 보내고 있어요.

솔직히 그의 당선이 걱정스럽습니다. 벌써부터 윤석열 당선인은 혐오와 차별, 본인의 무지를 아주 당당하게, 부끄럽지도 않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진작 강간죄가 개정되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게 됩니다.

현행 강간죄는 폭행/협박 여부로 유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주요 골자입니다. 2019년 조사 결과, 전국 131개 성폭력상담소 중 66개소의 강간피해 상담사례 분석 결과 1030명의 피해 사례 71.4%(735명)가 ‘직접적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 사례’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미투운동 이후 판사들의 판결이 위력과 위계를 고려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놓인 상황적 맥락을 파악하는 좋은 판결들도 나오고 있지만 기준 자체가 폭행협박의 유무이기 때문에 최근 발생하는 성폭력의 대다수를 포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폭력을 경험하는 피해자들은 판사들의 선의에 기대야만, 검사와 경찰의 성인지감수성이 괜찮은 수준이기를 기원해야만 자신의 사건이 법적 절차나마 밟을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그때 왜 저항하지 않았냐, 폭행도 협박도 없었는데 이게 성폭력이 맞냐’고 묻는 사회가 2022년에 걸맞는 수준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21세기가 시작되고도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우리가 ‘선생님, 그거 성폭력 아닌거 아니예요?’ 같은 허튼 소리나 들어야 합니까?

폭행과 협박을 성폭력의 판단기준으로 두면 자꾸만 피해자에게 묻게 됩니다. 선생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잖아요. 폭행협박이 없었는데 왜 신고하셨어요? 같은 이상한 질문들을요. 윤 당선인이 성폭력 무고죄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고도 무고죄로 몰릴 확률이 높아졌습니다. 실제 무고죄 유죄 비율은 채 3%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무고죄 강화라니, 세상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나 봅니다.

이제는 가해자에게 질문을 돌려줄 차례입니다. “상대방이 동의했습니까? 그 동의가 당신과의 권력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동의인 것은 아닙니까? 피해자의 동의가 정말 순수하게,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은 동의가 맞습니까? 피해자의 거절 의사를 충분히 존중했습니까?”

1953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강간죄의 시간은 제정 이후 단 한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멈춰있습니다. 그러나 법 제정 이후로 벌써 70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미처 법이 포착하지 못한 성폭력의 성격을 드러내는 많은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국회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계류된 비동의강간죄 개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십시오. 과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은 책임있는 자세로 응답하십시오. 그것이 광역자치단체장 세 명의 성폭력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에게 조화를 보내는 정치인들, 공공연하게 성폭력은 아니었다고 떠들어대는 2차 가해자들을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거대 정당이 쇄신을 위해 마땅히 보여야 할 책임입니다.

국회가 자신의 책임을 어디까지 유보하는지, 우리는 끝까지 지켜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발언7 김은경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소 활동가

 

저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이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소속 사제인 김은경 신부입니다. 교회들은 지금 시기를 사순절기로 보내고 있습니다. 극기와 절제와 기도에 힘쓰는 시기입니다. 어떠한 변화를 염원하며 묵고 낡은 습관을 끊어내 위해서 욕구차원의 것들을 절제합니다. 말과 행동과 먹고 마시는 걸 절제합니다. 이중에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마음, 사람이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걸 애써 외면하려는 마음, 그래서 차별하고 혐오하는 마음과 행동양식에 대한 절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를 당연시 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일상에 만연해있는 차별해도 되는 순간, 혐오해도 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여성이라서 성소수자라서 장애가 있어서 비정규직이어서 등등 매우 다양한 이유로 차별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차별과 혐오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롯이 개인에게만 차별과 혐오의 책임을 묻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차별을 허용하는 후진 구조를 무너뜨리고, 혐오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차별과 혐오를 끊기 위해서 차별금지법 곧 평등법이 제정된 사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불교는 자비를 유교는 인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위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는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게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차별받고 배제당한 이들을 특별히 돌보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별하고 혐오하는 공동체에 균열을 내고, 공동체의 외연을 그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키는 사랑이었습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걸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소외시켰던 이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따뜻하게 대해주며 그들의 목소리, 말과 사연을 듣고 존중하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길을 내주셨습니다.

교회에는 세상의 달력처럼 교회의 달력이 있습니다.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을 따르며 살아간다는 건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길에 자신의 삶을 포갠다는 걸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중 그날 배당된 성서 구절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마침 오늘 읽으라고 권해주는 복음 말씀이 차별과 혐오를 끊고 변화를 이루려는 우리들의 뜻과 맞닿아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떤 마을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거지 라자로를 혐오했습니다. 라자로의 배고픔과 고달픔을 외면하면서 부자는 매일같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라자로가 죽지 않게 하려고 그 부자네집 문간에 라자로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부자는 라자로를 외면했고 결국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거지 라자로는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의 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부자도 때가 되어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하늘이 아닌 죽음의 세계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뜨거운 불꽃에 시달리는 등 고통을 겪다가 문득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라자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부자는 죽기 전 무자비했던 자신을 후회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부디 라자로를 자신에게 보내서 물 한모금만 축이게 해달라고. 하지만 죽음의 세계와 하늘은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라자로가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라자로를 보내서 그들이 무자비하게 살다가 이 고통스러운 죽음의 세계에 오지않도록 경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의 형제들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 말이라면 들을 거라고 조르지만 아브라함은 그 부탁은 소용이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이야기입니다.

지금 여성을 차별하며 구조적인 여성차별은 없고 말하는 이들, 가부장권력을 가져서 지금 배부른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무자비한 사람들을 향한 경고말씀입니다.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사람은 차별하는 마음과 혐오하는 그 마음 때문에 이미 지옥을 살게 됩니다.

며칠전 대선에서 당선된 윤석렬 당선인은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하며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지만, 지금도 여성들은 1.4일에 1명씩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성폭력, 스토킹 등 다양한 사회적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폭력은 차별과 혐오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성적 지향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차별하고 배제시키는 건 그 차별과 혐오에서 기인하는 폭력의 문제 곧 범죄를 혀용하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짖밟는 차별과 혐오를 지금 당장 멈추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말해왔습니다.

더이상 존재 자체를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고 말해왔습니다. 과반수가 넘은 그리스도인들도 더이상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차별하고 혐오하고 배제하는 죄악을 멈추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이상 우리는 차별하고 혐오하는 후진 정치를 멈추고자 합니다. 차별과 혐오를 먹고 자라나는 이들이 생길 수 없도록 평등을 도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배제되는 이들이 없는 세상, 누구나 평등하고 당당해질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떠올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질 때 매우 큰 만족감을 얻습니다. 같은 지향을 가진 동료들이 좋은 팀웍을 이루고 서로 성장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신뢰를 쌓아나갈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내 동료나 친구가 어떤 성적 지향을 가졌는지, 여성인지 남성인지, 장애인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혐오하거나 차별하게 될 때 우리는 불안함을 느끼고 단절감을 느낍니다.

서로 다르지만, 각자 고유성이 달라도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며 서로 다른 그 다채로움으로 인해서 재미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채로운 존재를 만난 경험은 우리가 더욱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줍니다. 국회는 평등법 곧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다채롭고 평등한 존재들이 서로의 존재를 환영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결단할 때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복음 말씀은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를 배제했던 부자의 말로가 결국 죽음의 세계로 떨어지는 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입법부는 이 엄중한 경고를 듣고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들의 한마디 한마디 말에 귀기울일 수 있기 바랍니다.

모든 발언을 마치고 이어서 상담소 앎, 유랑, 신아 활동가의 시범으로 여성폭력에 저항하는 원빌리언라이징 춤을 함께 추었습니다. 역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니 신이 났습니다. 

내가 바라는 평등, 나에게 필요한 평등을 각자 적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흩어져서 1시까지 피켓팅을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국회 안으로 들어가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정치가 희망이 되기를요!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신아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