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슈를 말하다

모두 가해자 껌을 질겅질겅 씹어 봅시다 !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피부색 · 외모 · 성격 · 생각들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어느 한 분야에서도 다같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남녀에 대한 차이도 있고, 심지어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또한 자신들이 겪는 성폭력에 대해서도 그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는 경우도 있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성폭력에 대한 방송을 접할 때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었지만, 때로는 성폭력 생존자를 낙인을 찍거나 피해자화 시키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남성적인-가부장적인-이중적인 성규범에 대한 인식이 몸에 배여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몸이나 생각에 배여버린 것인즉,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를 입을 만한 옷 차림이나 피해를 당할 만한 몸가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때로는 나의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때도 있었다. 때론 내가 겪은 데이트 성폭력 피해도 피해가 아닌 것처럼 생각했었고, 데이트 상대이기에 싫은 스킨십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딱히 ‘내가 싫은데 왜 스킨십을 해야 해?’라는 항변도 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에서도 내가 혼란스러워했던 남성적인-가부장적인-이중적인 성규범에 대한 내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보면, 하나는 어렸을 때의 성적인 장난이 여성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상처로 기억되고 있는데 반해 남성들에게는 놀이나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인터뷰에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노출이 성폭력의 사유가 되지 않음에도 남성들은 그들의 억압여부를 떠나 여성들의 옷차림이 성적 충동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아니라, 여성들도 성폭력 생존자들의 행실을 문제 삼는(상처받았던 말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말로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2차 피해를 주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이 부분이 안타까웠던 것은 여성이 여성들을 바라봄에 있어서도 남성적인 시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성폭력의 문제도 인식의 문제가 아닐까. 성폭력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나 성폭력 생존자를 낙인찍는 일도 우리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일도 망각하게 만든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받은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은 주변의 이야기나 인식, 자신들에게 배여 있는 생각들로 그 기억들이 지워지고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 생존자들의 기억은 노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몸은 성폭력 피해를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읽은 사례에서도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 여성이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성적인 학대-아버지가 여성의 성기에 차가운 숟가락을 대는 성적학대-로 훗날 여성이 자라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차가운 수술 도구가 성기에 닿자 기절해 버린 사례. 이런 사례들은 성폭력이 성폭력 생존자들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평생 안고 가야할 기억과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에서도 평생 안고 가야할 기억과 상처를 가진, 성폭력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드러내고 있다. 성폭력 생존자들은 그들의 다양한 피해를 그들만의 방법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에 등장하는 생존자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피해를 알림으로 해서 성폭력을 예방하고자 한다.

또한 성폭력 생존자들에게는 남의 이목이 두려워 피해사실을 숨기고 혼자서 아파하는 것만이 해결방법이 아님을 알려주고, 성폭력 가해자들에게는 피해 여성들이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당당히 자신들의 피해와 사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는 성폭력 피해자나 가해자 뿐 아니라 우리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술이나 여성들의 옷차림이 성폭력 가해 사실을 가릴 수 있거나, 성폭력의 동기가 될 수 없음도 이야기 해 준다. 이러한 점이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가 다른 성폭력 관련 필름과 달리, 다른 생존자들에게 힘을 더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스스로가 다시 한 번 피해자들을 더 고통받도록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내 가족이나, 내 딸.. 내가 당했더라면 (나도 언제 어디서 성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네가 행실이 잘못 되어서’, ‘너도 성적인 스킨십을 즐긴 것 아니냐’는 등의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생각의 저변에 깔려 있는 남성적인-가부장적인-이중적인 성규범을 버려야 할 것이다. 남녀 모두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지 않는, 다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희망한다. 나의 희망에 발맞추어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의 필름은 많은 사람들의 인식변화에 촉매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에 등장한 사례자들 뿐 아니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들이야 말로, 미국의 제니퍼 슈잇-자신을 공개해 범인을 잡고 19년 간의 악몽과의 싸움에서 벗어난 여성-이 아닐까? 제니퍼 슈잇이 말한 것처럼 나도, 성폭력 피해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라 칭해주고 싶다.

나도 오늘은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의 한 사례자와 그녀를 돕는 친구들이 나눠준 껌을 받아, 성폭력 가해자라 생각하며 단물이 빠질 때까지 껌을 질겅질겅 씹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