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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오름길



_7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춤추는 오름길> 리뷰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와의 인연은 2005년 3회 행사 ‘그녀들의 소란, 공감의 세상을 열다’ 기획단으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매년 행사가 그랬을테지만 3회 행사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말하기대회를 만들어보겠다는 기획단의 열의가 뜨거웠다. 길거리 사전 행사를 진행하고, 남성 듣기 참여자를 허용(!)했으며 행사 후에는 참여자와 기획단이 함께하는 생존자 캠프도 열렸다. 

 나에게도 그 행사는 매우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나의 최초의 ‘말하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나는 (그 해 첫 기획단을 시작으로 몇 번의 기획단 내지는 잡일꾼으로 결합하면서 내내) 나는 내가 말하기 참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말하기 참여자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움직여 더 좋은 행사를 만들자, 뭐 이런 대견한 생각을… 했던 건 아니고, 이 행사를 준비하고 기획하면서 나만의 말하기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나는, 
   내 경험을 직면하지 못했다. 모래 위에 정성껏 그린 그림을 누군가 슥 흐트렸는데 나는 상대에게 한 마디 화도 못내고 한발 물러서서 그 그림을 잠시 바라보다 차갑게 홱 돌아선 것 같은 상태였다.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 말하기의 의미를 고민하고 그 무대를 기획하는 일은 그렇게 돌아선 어린 나를 다시 그 그림 앞으로 불러내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회의를 하다 보면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도 더 나오고 나는 그때마다 내 경험들이 떠올라 화가 났다가 서글펐다가 비참해졌다. 그렇게 회의를 끝낼 때쯤에는 진이 빠졌고 회의를 하고 온 밤이면 악몽을 꿨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이미 해질 대로 해졌고 몸은 둘 사이의 괴리감을 감담해내지 못해 버거웠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갔다.
사람들 앞에 선 말하기 참여자들, 절망의 바닥 저 끝까지 닿아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기운이나 표정을 가진 이들…을 보면 저들이 바로 나고 내가 저들이었다. 아릿하다가 짠하다가 지겹다가 도무지 모르겠다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치유 작업이 시작되었고 말하기대회 기획단으로 함께하는 일은 그래서 내게 나만의 말하기였고, 그 작업이 지리멸렬해질 때는 기획단을 못하기도 하고 그랬다. 말하기대회가 내 말하기와 치유 작업의 기원이었지만 이제는 그 치유 작업 와중에 말하기대회가 있다. 



  말하기대회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는 당연한 일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매번 참여 신청을 하고 나면 기분이 묘해진다. 행사 당일이 되면 가지 말까 속생각을 몇 번이고 한다. 내가 무얼 보자고, 뻔하디 뻔한 그 이야기와 상처를 들어 무엇 하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나는, 간다. 아물어가는 상처를 굳이 헤집고 소독약을 끼얹는 심정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매 회 말하기대회에 서는 참가자들을 보며 다짐한다. 포기하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서 있겠지, 하는. 

  올해도 그러니까 다를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올해는 무언가 조금 달랐다. 합창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인지 첫 곡이 나올 때부터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말하기대회를 가기 전에는 늘 여러 번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 때문에 행사에 가서는 눈물을 터뜨리거나 하지 않는데도 이번엔 그것이 무색하게도 시작부터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추스리다가도 어떤 문구들을 마주치면 그렇게 허물어졌다. 무서웠어요, 라든가 엄마, 라든가. 사람이 마음을 다해 내는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참가자들이 자유로운 몸짓을 하는 퍼포먼스에서는 장엄한 느낌마저 들었다. 내 안의 기운도 저렇게 펄럭일 수 있다면, 저렇게 자유롭게 거칠게 미친듯이.


   행사가 끝나고선 간만에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따뜻한 기운으로 그 자리를 채운 것처럼 개운하고 편안했다. 첫 작사가 데뷔도 뜻 깊었다. 사실 연습실에서 어설픈 동작과 함께 들었을 때가 더 좋았다.
나의 암울했던 시간에 잔잔하게 사뿐사뿐 음을 붙여준 소히님, 거기에 온기를 불어넣어준 합창단 친구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말하기 방식이 다양해지고 무대 연출이며 진행이 확실히 더 ‘세련되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나 성폭력 피해에 대한 말하기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다고도 할 수 있겠고 행사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옛날 우리네 살풀이나 마당놀이, 굿판처럼. 

  다만 그저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나 저렇게 세련되게 다듬어진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같은 건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참여자들의 모든 요구를 큰 말하기대회에서 모두 수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나는 말하기대회가 듣기 참여자들과 말하기 참여자들의 거리를 더 넓히진 말았으면 하고 소망할 뿐. 딱 이 정도까지, 뭐 이런 마음으로.

  나는 또 언젠가 저기에 서서 내 이야기를 하는 꿈을 꾸며 돌아왔다. 나는 그 꿈에 여전히 한발한발 다가서고 있는 중이고,













 ※ 본 리뷰는 블로거 '이채' 님의 포스팅을 편집·수정한 것입니다. (원문 읽기
 _블로그:: 이채, 날다
_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