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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성폭력 피해가 부끄러운 것인가요?_영화 <도가니> 읽기(5)

영화 <도가니> 이슈가 전국을 휩쓰는 지금,
'성폭력 없는 사회'라는 상담소 활동가들의 희망을 이 광풍의 끝자락을 붙잡고 불태워봅니다.
그 시리즈 마지막 이야기는 '친고죄'에 관한 것입니다.
민수가 법정에 서지 못하고, 결국 개인적인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은
왜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민수가 법정에 설 수 없었던 이유

사진: 도가니 홈페이지

영화 <도가니>를 보면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를 진술하려고 준비하던 민수가 법정에 한번 서보지도 못한 채 울분을 삼키다가 결국 가해자를 찾아가서 살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성년자인 민수를 대신해서 할머니가 가해자 측과 합의했기 때문에 고소는 취하되고 국가는 가해자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게 된 것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했기 때문에 명백하게 죄가 있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상황,
바로 친고죄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친고죄란?

친고죄는 피해자가 직접 고소를 해야만 수사가 시작되는 범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친고죄인 경우에는 그 범죄를 목격하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 고발하는 것으로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사건을 수사할 수 없습니다.
현행 법상 친고죄인 범죄는 개인의 명예나 사생활 침해와 같이 사회질서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관련된 범죄들입니다. 예를 들어 사자명예훼손과 모욕, 간통, 비밀침해, 친족 간의 재산 범죄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간이나 강제추행 등 성폭력 범죄도 친고죄에 포함됩니다.



성폭력 범죄가 개인의 문제?

국가가 나서서 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클 것입니다.
국민들이 합의한 원칙, 그 사회의 상식이 지켜져야 국가 공동체가 원활하게 잘 운영될 수 있겠지요.
성폭력 범죄를 처벌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성폭력 범죄는 타인이 동의하지 않은 성적인 행동을 함부로 함으로써 피해자에게 상당한 고통을 줍니다.
이런 범죄 행위를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뿐 사회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요?



성폭력 피해를 부끄러워 해야하나요?

흔히들 개인의 명예와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폭력 범죄를 친고죄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결국 성폭력 피해자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당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는 성폭력을 매우 중대한 범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지요.
많은 사람들은 성폭력 범죄 때문에 상당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치안이 강화되고 누구든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위한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회적 사안인데,
성폭력 범죄를 개인간의 문제, 개인의 명예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고소하지 않는 한
국가에서는 절대 수사를 하지 않는 사건으로 치부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친고죄 때문에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

친고죄는 오로지 피해자 당사자의 고소 의지에 따라 수사와 처벌 여부가 결정되므로,
피해자의 고소 취하로 형사절차를 정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목숨 걸고’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도록 설득합니다.
이런 과정을 보통 ‘합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굳히고 어렵게 고소를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가해자의 합의 종용에 시달리게 됩니다.
민수의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합의문을 들고 찾아온 가해자와 합의를 하게 되지요.
가해자들은 계속해서 연락을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집으로, 직장으로, 학교로 찾아와서 합의해 달라고 매달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협박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냐구요? 합의를 안해주면 주위에 소문을 내겠다, 죽어버리겠다, 네가 합의를 안 해줘서 온 가족이 다 초죽음이다 등등.
낮이고 밤이고 찾아와서 동네 시끄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각종 협박에 이르기까기
피해자의 처지를 난처하게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입니다.




친고지 폐지가 절실한 이유

2010년 3월 23일 기자회견

피해자를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명예와 프라이버시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고소하고 처벌받도록 하는 과정은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입니다.
개인의 고소의지에 가해자 처벌여부를 맡겨두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피해자의 명예를 들먹이면서 친고죄를 유지하는 것이 결국은 성폭력은 부끄러운 일, 개인적인 치부라는 생각을 더욱 더 공고히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오히려 가해자를 도와주는 결과밖에 안 되지요.
피해자 보호는 ‘친고죄’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술녹화제도의 확대, 비공개신청권, 피해자의 형사절차 참여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 수사와 공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가해자가 제대로 죗값을 치르는 것은 피해자의 회복, 범죄 예방,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 제고 등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진정으로 성폭력 범죄를 걱정하고 피해자를 돕고자 한다면 친고죄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