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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 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활동가 인터뷰] 최란 활동가_서른에 시작한 2라운드, 여성운동가

[한국성폭력상담소활동가 인터뷰]

 

최란 활동가_서른에 시작한 2라운드, 여성운동가

 

 

 

이윤상(한국성폭력상담소 前 소장)

 

 

올 해 31살을 맞은 최란. 그녀는 4개월 차 한국성폭력상담소 새내기 활동가다. 여성단체, 성폭력, 상담 그 어느 것에서도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그녀가 갑자기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도전장을 내민 건 무슨 사연일까, 처음부터 여성단체를 내가 일할 곳이라고 선택한 나와 진입경로가 다른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꼭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고 싶었다는 속 깊은 사연, 4개월을 맞은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꺼내보았다.

 

 

운동권 학생, 목적의식적 취업

 

“대학 1학년 때 교지 편집국에 들어갔는데 거기가 운동권이었던 거죠. 그때는 대학에 들어가면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투쟁 열심히 하는 게 젊은이의 특권이라고도 생각했고. 한마디로 학생운동을 한 거죠. 대학 4학년 때 노동운동 조직에 가입했고 졸업 후에도 자연스럽게 노조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역시 그녀도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 졸업 후에는 자연스레 노조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여성 비정규직 조직 사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비정규직은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고, 또 나는 졸업하면 일할 수 있는 현장을 가야한다고 생각했죠.” 현장? 위장취업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나의 노동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필요했죠.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는 취업이죠. 그래서 여성 비정규직을 찾아서 대형마트에서 일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처음에 이마트 캐쉬어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어요. 다시 홈플러스에 지원해서 거기서 8개월 정도 일을 하고 노조가 있는 대형마트로 옮기려고 하던 때, 이랜드 투쟁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 이랜드 투쟁 상황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죠.”

 

 

노동자 없는 노조

 

목적의식적 취업을 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녀는 투쟁 현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거기서 투쟁이 마무리 될 때까지 1년 반을 보내고 지하철 노조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노조 일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파업을 접은 집행부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를 사임하면서 노조의 채용직 활동가인 그녀도 함께 그 곳을 나온다.

 

“현실과 완전 분리된 듯한 요구를 한다고 느끼게 일하는 노조활동에 회의를 많이 느꼈어요. 예를 들면 지하철 노조 같은 경우 그 당시 첨예했던 이슈는 역무원 인력을 줄이는 문제였어요. 서비스지원센터를 만들어서 거기에 근무년수가 많거나 성과가 낮은 사람들을 배치해서 퇴직을 유도하는 거죠. 그러니까 노동자들은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데, 노조에서는 그런 일은 사소하다 치부하고 지하철 민영화 이런 이슈에만 집중하니까 조합원들의 지지를 못 받는 거죠. 조합원들을 설득해내지 못하는 거지, 노조가.”

 

조합원들의 의견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조, 구태의연한 투쟁방식과 운영방식으로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노조에 대한 회의가 커져갔다. 노동자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잃어가는 조직, 게다가 홍일점으로 일하면서 남성중심적인 조직에 ‘학을 떼는’ 일도 늘어갔다.

 

“홍일점으로 일했네요. 참 힘들었겠다.” “ 그런데 그냥 직장이다 생각하고 일하면 할 수 있어요. 돈도 많이 주고, 일도 별로 없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다음 일터로 선택한 곳이 민주노총 서울본부. 초심을 기억하면서 제대로 노조활동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거기서 처음부터 계획했던 여성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노조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상담 및 지원, 노조 결성을 독려하는 캠페인, 전략적 조직화 사업 등이 주요 업무였는데, 최란은 여성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주로 담당하였다. “나는 콜센터 노조를 조직하고 싶었어요. 그 당시는 콜센터 노조가 없었거든.”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왔던 일을 하면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고 한다. 당연히 신명이 났을 게다.

 

“그런데...거기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었어요. 뭐였냐면 그 당시 선출된 간부들이 입장이 확실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럴 경우 추진력은 있지만 반면 소통이 잘 안되면 채용직 상근활동가들하고 어려움이 생기게 되죠. 그래서..소통이 잘 되지 않았는데 지도부가 아주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 거죠.” 상근활동가들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자 지도부는 사과문을 내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를 수용하지 못했던 활동가들이 대거 그만두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때 그녀도 함께 사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까지 일이 커졌나요?” “그 때 초중고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원들을 대거 조직화 하였어요. 곽노현 교육감이 당선되면서 교육청 안에서도 조리원 근무조건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런데 그들이 어떤 조직에 소속될 것인지를 놓고 집안싸움이 일어난 거예요. 조합원 수에 따라 노조의 조합비가 달라지니까. 처음부터 원활하게 소통됐다면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텐데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해버리니까 갈등이 생긴거죠. 그런데 지도부는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그러면서 여러 조직 간의 불화가 생기고... 노조 안에서 서로 지분 싸움을 했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워요. 그 분들이 어디에 들어가든 그 분들의 처우가 개선되고 권리가 보장되는 게 중요한 건데... 노조에 대한 정나미가 뚝 떨어졌죠.”

 

 

반성폭력 운동, 여성단체

 

노조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정서적 동의가 사라지고 나서 새로운 공간을 꿈꾸었다. 그리고 거기가 여성단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대해서는 이전부터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노조 활동을 하면서 여성활동가 모임을 꾸준히 꾸렸는데 스터디를 하면서 상담소에서 발간한 자료도 많이 보았고, 직간접적으로 상담소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노조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들 중 한국성폭력상소에서 지원하는 사건들도 있었다.

 

민주노총을 그만두고 보낸 시간이 1년. 30대를 바라보는 여성에게 1년의 공백이 초조하지 않을 리 없다. 1년 동안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기회를 기다리면서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았다. 자신의 경력으로는 노조 말고는 딱히 이력을 내밀 데가 없는데, 여성단체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냥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기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상담소가 왜 매력적이었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도도함, 자신감, 발랄함’을 꼽는다. 혹시 설익은 기대감만 잔뜩 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미심쩍은 마음을 깔끔하게 해결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여성단체라면 여성노동운동을 하는 곳에 갈 수도 있지 않았나요? 그게 란의 관심사나 경력하고도 더 잘 맞고.” “물론 그런 조언 많이 받았죠. 그게 내 경력을 살리는 것이기는 한데, 흥미롭지는 않았어요.” “왜죠? 하던 거라서?” 나의 발칙한 반문에 따라온 그녀의 답변은 진지했다. “여성노동문제를 바라 볼 때도 ‘생물학적 여성’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달까. 예를 들면 이런거죠. 민주노총 내에도 여성할당제가 있지만, 부위원장 같은 선출직에 그냥 여성을 내보내는 거예요. 여성주의적 감수성 이런 것 상관없이 그냥 여성이면 자격이 된다고 보는 거죠. 직장내성희롱 문제는 모든 여성들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인데, 노조 안에서 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 과정에서 여성활동가들은 떠나고...”

 

그녀에게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결과다. 여성 조합원은 있지만 여성의제는 없는 조직, 여성간부는 있지만 젠더감수성은 없는 조직. 결핍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많은 질문 끝에 만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그녀에게 해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곳에서 질문을 새롭게 구성하여 새로운 해답을 찾는 일을 시작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후 4개월, 그리고 지금

 

큰 기대를 가지고 어렵게 시작한 일인데 얼마나 만족하냐는 질문을 던질 때 사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내가 대표로 활동했던 조직인데 실망했다고 하면 어쩌나 은근히 긴장됐다. “업무량은 많아요.(웃음) 얼마전에 행사 끝나고 우연히 여성신문 기자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기자가 묻더라구요, 월급도 적고 일도 많은데 어떠냐고. 개인적으로 만족도 최상이라고 얘기했어요. 제가 여성주의 상담팀에서 생존자 당사자를 만나는데 그렇게 당사자와 관계 맺는 게 나한테는 새로운 일이죠. 그 경험이 나의 시각을 넓히고 사고도 넓어지게 해요. 실제로 나의 감수성이 변하는 것을 느끼죠. 예전 같으면 하지 않았을 생각을 해보게 돼요. 사람을 만났을 때 보이는 부분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얘기하지 않는 부분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돼요. 난 예전에는 무척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한번 굳힌 생각이 잘 안 바뀌는 사람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데 여성주의 상담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른 분들이 내담자를 만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또 내가 피해자를 만나면서 느끼고 배우는 것들이 내가 인간관계를 맺는 양식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구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는 상담소가 어떤 일을 할까, 어떻게 운영을 할까, 이런 게 궁금했다면 이제는 어찌 보면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돼요.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 몰랐던 면도 알게 되더라구요.”

 

상담소 조직운영에 대한 문제점을 보는 눈도 예리하다. 개인이 알아서 처리하게 되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은 파트너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시너지를 오히려 잃게 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따끔하게 지적할 때, 의사결정을 위해서 충분히 논의할 시간도 부족하고, 업무의 진행여부가 제대로 점검이 안 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보인다고 얘기할 때, 역시 조직에서 일했던 내공이 돋보였다. (보통은 3-4달 동안은 자기 일을 익히는 것만도 바쁜데, 그 사이 조직운영의 문제점까지 파악하는 노련함이란!)

 

나는 가족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위계적이지 않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동료관계... 이런 것들을 장점으로 꼽지 않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막연한 기대감은 쉽게 실망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기대했던 일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성단체 경력도, 상담경험도 전무한 자신을 채용하는 상담소의 선택이 ‘위험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 상담소가 저 멀리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기에, 자신의 욕구를 소중히 다스리고 매의 눈으로 상담소를 찬찬히 살핀다.

 

“나이 서른에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출발선에 섰어요. 더 열심히 하고 싶고, 잘 하고 싶습니다. 요즈음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긍정적인 에너지가 오래 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면서도 “물론 상담소의 좋지 않은 면도 곧 보게 되겠지요.”라는 말도 잊지 않아서 그녀가 더욱 든든하다.

 

 

 

* 이글은 2월에 인터뷰하고 쓰여진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