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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법정에서 선글라스를?

여성논단
법정에서 선글라스를?

▲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의 담당자들이 인권 감수성을 기반으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수사와 판단을 하는 사회라면 피해자들이 굳이 법정에서 선글라스를 찾지 않아도 된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엄한 법정에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증언을 하러 나간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 모두 기겁을 하며 말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의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했다느니, 혹시 즐기고도 딴소리 하는 것 아니냐는 등 오히려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차림새는 분명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 법의 어디에도 증인이 선글라스를 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지만 나는 지금까지 법정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한 분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설혹 신청을 한다고 해도 소송 지휘권을 갖고 있는 재판장은 증인이 증언할 때 눈빛이나 표정 등을 통해 심증 형성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선글라스 착용을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내가 만난 한 피해자의 어머니는 딸이 1시간 넘게 법정에서 신문받는 것을 지켜보시더니 증인이 선글라스라도 낄 수 없겠느냐고 물으셨다. 특히 피고인 측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할 때 “당시에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 “평소에 피고인을 좋아한 건 아니냐” “(피고인이) 오른손으로 만졌냐, 왼손으로 만졌냐” “피해를 입었다면 헤어질 때 왜 밝은 목소리로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까지 하고 택시에서 내렸느냐” 등 쉴새없이 퍼붓는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의 질문이 너무 어이없고 부당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피고인 측 변호인이 증인의 바로 코앞에 앉아 거의 노려보면서 추궁하듯 질문을 해대는 데는 그 누구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라는 지적을 하셨다. 그러니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라도 선글라스를 쓰도록 할 수는 없느냐는 말씀이셨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증인으로 출두할 때 갖는 법적 권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수 차례 개정작업을 거치며 비교적 잘 마련돼 있다. 비공개 재판을 신청할 수 있고, 신뢰관계인을 동석할 수 있으며, 직접 재판정에 나오지 않고 법정 옆에 마련된 화상증언실에서 증언할 수도 있다. 위 사례에서도 피해자에게 인권침해적인 질문을 할 때 검사나 재판장 등이 피고인의 변호인에게 주의를 준다거나, 화상증언실에서 증언하거나, 피고인의 변호사와 증인 사이에 칸막이를 해서 서로 직접 얼굴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법원의 증인보호관이 이러한 피해자 권리를 안내해준다고는 하지만 피해자들은 선뜻 이러한 제도를 활용하지 못한다. 대부분 사전에 신청을 해서 재판장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 신문 중에 즉각적으로 그 권리를 요구하기는 어렵다.

법과 제도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법 제정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위 사례처럼 직장 상사와 직원이라는 명확한 권력 구도 속에서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왜 헤어지면서 공손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 피해자의 경험은 법의 ‘객관성’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성폭력 수사와 재판 과정의 담당자들이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반으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수사와 판단을 하는 사회라면 피해자들이 굳이 법정에서 선글라스를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1386호 [정치] (2016-04-21)

이 글은 여성신문 정치면에 2016년 4월 21일자로 게재된 기사입니다. 글쓴이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