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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4월 11일, 헌법재판소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그날의 기록, 그리고 그 이후……

4월 11일, 알림이 울리기 전에 심장이 울려서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지난 2년 동안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 담당자로서 함께 했던 활동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2019.03.30. 집회 <카운트다운: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에서 상영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활동 보고 영상

낙태죄 폐지 운동에 함께 연대해온 여성/사람들의 얼굴들도 떠올랐다.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준 임신중지 당사자들, 다양한 관점으로 '진짜 문제는 낙태죄'임을 고발하고 규탄해온 발언자들과 1인 시위 참여자들, 매번 집회와 기자회견을 가득 채우고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피켓을 높이 들어올렸던 연대자들, 항상 배움이 되고 든든한 동료로 신뢰하는 모낙폐 활동가들, 레베카 곰버츠를 비롯하여 국제 연대로 서로 힘과 용기를 나눈 전 세계의 재생산권 운동가들, 여성 군중들의 얼굴로 상상되는 23만 명의 낙태죄 폐지 및 미프진 도입 국민청원까지…….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선고하든 우리의 패배는 아니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추운 비바람과 우박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당차게 진행되었던 3월 30일 집회 <카운트다운:우리가 만드는 낙태죄 폐지 이후의 세계>를 회상했다. 기존 세상의 마지막 저항 같았던 궂은 날씨는 오히려 나에게 '우리가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감동과 확신을 주었더랬다. 그래, 우리는 이미 세상을 바꾸었다. 오늘의 결과는 헌법재판소가 변화한 세상을 따라올 것인지 뒤쳐질 것인지 문제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분노와 좌절이 아니라 희망과 성취감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고 싶었다.

 

오전 7시, 헌법재판소 앞에 도착했다. 이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헌법재판소 현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선착순 20명에게만 지급되는 현장 방청권을 받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낙태죄는 위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피켓을 당당하게 들고 헌법재판소를 향해 마지막 1인 시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낙태죄 폐지 반대 세력은 보이지 않았지만, 경비원들은 혹시라도 충돌이 있을까봐 우려하는 듯 각 세력의 위치, 폴리스라인 설치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낙폐 활동가들은 선고 당일 새벽에도 온라인으로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선고하든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했다. 국회와 정부를 향한 입법 운동, 언론 대응, 여론 조성 및 대중 교육, 여성/사람들과의 지속적인 소통과 연대, 사업비 충당을 위한 후원 모금……. 경우의 수를 따지며 각 대응전략을 첨예하게 검토했다. 사실상 환영이냐, 규탄이냐 논조의 차이일 뿐 큰틀에서 우리가 요구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오전 9시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각계 릴레이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2019년 4월 1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주요 일정

첫 시작을 연 것은 청년학생 기자회견 <낙태죄는 위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판결 촉구 청년학생 기자회견>이었다.

 

청년학생 기자회견은 경희대학교 페미니즘 학회 여행, 보건의료학생 매듭,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전국학생행진, 충북대학교 사회과학학회 인터뷰, 학회학술네트워크, 학회학술네트워크 프로젝트그룹 alda 에서 공동주최했다.

 

고려대학교 정치경제학연구회 수레바퀴 최서현,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 황강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학생회장 이승준, 

보건의료학생 매듭 율

 

등의 발언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 헌법재판소에게 더 나은 선고를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다. 꾸준히 투쟁해, 오늘 헌법재판소가 선고하게끔 만들었던 그 힘으로, 여성의 권리가 보장된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는 발언자의 말에 특히 공감이 갔다.

 

청년학생 기자회견

다음으로 9시 30분부터 종교계 기자회견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두를 위한 재생산권 보장하라! 아멘!>이 진행되었다. 

 

종교계 기자회견은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기독여민회, 믿는페미, 사단법인 평화의샘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성공회 길찾는교회,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에서 공동주최했다.

 

기자회견은 기독여민회 남궁희수님의 시작기도로 열렸고, 

 

사단법인 평화의샘 부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남성아,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김신애,

 

등의 발언이 있었다.

 

이어서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원장사제 자캐오, 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이은재 님이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낙태죄는 위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아멘!

낙태죄를 폐지하고 전면 비범죄화 하라, 아멘!

낙태죄를 폐지하고 재/생산권 보장하라, 아멘!

낙인과 차별 없는 재/생산권 보장하라, 아멘!

 

마지막에 '아멘'을 붙인 구호가 하루종일 입안에서 맴돌았다.

 

종교계 기자회견

이어서 10시 20분에는 청소년 기자회견 <청소년의 안전한 임신중지와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하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청소년 인권단체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청소년 기자회견은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에서 공동주최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라일락,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양지혜,

청소년 강민진,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유경,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토토, 

청소년 또뜨(대독 김윤송)

 

등의 발언이 있었다.

 

청소년 기자회견

11시부터는 성과재생산포럼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성과재생산포럼에서 주최한 기자회견은 따로 현수막 없이 진행되었지만, 올곧게 서서 기자들을 응시하는 성과재생산포럼 활동가들의 모습은 무척 당당하고 멋있었다.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나영정,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안팎,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박종주,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이자 산부인과 의사 최예훈,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 황지선,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박한희,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이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장 나영

 

등의 발언이 있었다. 

 

헌법재판소 앞은 이제 기자회견 참여자들과 방청 대기자들, 기자들로 혼잡하게 붐볐다. 앰프의 음량이 충분하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웠다. 

 

성과재생산포럼 기자회견

11시 40분부터는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주관한 교수연구자 기자회견 <낙태죄는 위헌이다!>가 진행되었다.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나영,

여성연합 정책위원 김은희,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송다영,

서울대 여성학연구소 신상숙,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대표 정미례,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김영순,

 

등의 발언이 있었다. 

 

교수 연구자 기자회견

이어서 12시 20분부터 장애계 기자회견 <장애인의 생명, 장애인의 성적 권리, 장애인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낙태죄 폐지! 지금 당장!>이 진행되었다.

 

장애계 기자회견은 장애여성공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공동주최했다.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이라나,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 이형숙,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박서연,

장애여성공감 회원 김미진,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조경미,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김난슬,

장애여성공감 회원 서지원,

 

등의 발언이 있었다.

 

중간부터 헌법재판소 사무처 현판 앞에서 낙태죄 폐지 반대 세력의 반대 기자회견이 시작되어 음향이 겹쳤다. 반대 세력의 음향이 너무 크고 선명해서 장애계 기자회견 발언이 거의 들리지 않는 현실이 속상했다. 내심 돈을 모아서 단체에 음향 기기를 후원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반대세력은 선착순 방청권을 애초에 포기한 듯, 길건너편에서 우리를 삼 방향으로 둘러싸고 반대 집회를 진행했다. 주된 구호 중 하나로 '페미니즘 단체 해산하라'를 외쳐 황당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장애계 기자회견

오후 1시, 사전/현장 방청자가 헌법재판소 안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사무국 닻별 활동가가 사전 방청자로 입장했다(닻별의 선고 방청 후기는 별도로 게시될 예정이다).

 

같은 시간, 노동당, 녹색당, 사회변혁노동자당에서 공동주최하는 진보정당 기자회견 <낙태죄는 위헌이다!>가 진행되었다.

 

이때부터는 너무 긴장되고 정신이 없어서 누가 어떤 발언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진보정당 기자회견

오후 1시 40분부터는 의료계 기자회견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침해하는 낙태죄를 폐지하라>가 진행되었다.

 

의료계 기자회견은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행동하는간호사회가 공동주최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기자회견에 나선 의료인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의료계 기자회견

마침내 2시 30분, 준비된 순서가 끝나고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기자회견 차례가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그날의 선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낙태죄' 위헌소원은 16번째 순서였다. 

 

모낙폐 기자회견은 헌법재판소 선고 결과에 따른 입장 발표를 중심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우리는 대열을 갖추고 서서 선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낙태죄는 위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연신 구호를 외쳤다. 한손으로는 휴대전화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방청하러 들어간 닻별의 실시간 소식을 확인했다. 낙태죄 폐지 반대 세력의 커다란 음향이 "선고 결과 나왔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기자회견

"헌법불합치!"

 

흥분에 찬 선언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터져나왔다. 우리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친 환호성이었다. 이어서 모두가 기쁨에 겨운 환성을 내질렀다.

 

아직 닻별의 선고 결과 보고는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닻별은 회원소통 담당자답게 활동가들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SNS에 먼저 선고 결과를 공유했다고 한다. 

 

사회를 맡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집행위원이자 성과재생산포럼 유림이 환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쳤다.

 

"낙태죄는 위헌이다! 우리가 승리했다!"

"우리가 승리했다! 낙태죄는 폐지됐다!"

 

#낙태죄는위헌이다_우리가승리했다 #우리가승리했다_낙태죄는폐지됐다

동료들을 끌어안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과에 의연하려고 마음먹었지만, 헌법불합치가 선고되자 솔직히 죽다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활동해왔던가! 쉴새 없이 밀어닥치는 회의와 업무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내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인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상담소 활동가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더랬다.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도 오늘을 준비하기 위해 아플 수 없었던 그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에 가슴이 벅찼다. 새로운 역사를 쓰는 현장에 서있다는 감동과 떨림이 온마음 가득 퍼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아직 마음 편히 울 수 없었다. 공식적인 일정으로 모낙폐 기자회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낙태죄 폐지 반대 세력은 바로 규탄 기자회견에 돌입했지만, 우리는 위헌소원 공동변호인단과 함께 이번 선고 결과에 대한 입장 발표를 하기 위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변호인단은 헌법재판소 안에서 기자들에게 붙잡힌 듯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번 결정에 대한 규탄 발언을 조용히 듣고만 있을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불합치! 불합치! 불합치! 불합치!"

 

우리는 소리높여 외쳤다. 부소장 오매가 특유의 위트 넘치는 표정으로 "부럽지?"라고 반문해서 나는 깔깔 웃었다. 불합치, 부럽지, 불합치, 부럽지…….

 

모낙폐 집행위원들이 하나둘 기자회견 앞줄로 모였다. 맨 뒷줄에서 대형 피켓을 흔들고 있던 나도 상담소 활동가들의 배려로 자리를 옮겼다. 다들 그동안 낙태죄 폐지를 위해 가장 열심히 활동해온 활동가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변호인단이 나오는 시간이 예상보다 너무 늦어져 먼저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 나영, 제이, 설희님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후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검토하여 입장문을 보완했고, 4월 1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다시 한 번 발표했다.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소원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입장

 

4월 12일 입장문 전문 보기(클릭)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경제 개발과 인구 관리의 목적을 위해 생명을 선별하고 여성의 몸을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 그 책임을 전가하여 왔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중대한 결정이며, 우리는 이를 크게 환영한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해당 조항들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명확한 위헌결정으로 완전히 입장을 모으지 못하고 다시 입법자들에게 변화의 책임을 넘긴 것은 아쉬우나, 그럼에도 이번 결정에서 단순위헌 의견 재판관 세 명, 헌법불합치 의견 재판관 네 명의 의견으로 압도적인 위헌 의견이 제시된 것에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잠시 후 위헌소원 공동변호인단이 헌법재판소에서 나와 대오 앞에 섰다.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공동변호인단 중 한 명의 발언이 있었는데, 이번 선고가 변호인단만의 성과가 아니라 그동안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함께 한 수많은 여성들과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취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윤정원 님의 발언도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찾아와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제 여성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발언이었다. 의사로서의 업무를 병행하면서 활동가 못지 않게 열정적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에 참여해온 분이었기에 더더욱 진심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낙태죄 위헌'이라고 쓰인 피켓을 하늘 높이 던지며 기자회견을 마쳤다.

 

'낙태죄 위헌' 피켓, 이제는 안녕!

 

그제야 활동가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이 '그림'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댔다. 찰칵찰칵찰칵찰칵찰칵…… 나도 눈이 마주치는 동료마다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동안 분노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배우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감격하고, 확신하고, 든든해하기도 했던 감정을 충분히 흘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눈치없는 셔터소리 때문에 몰입이 안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떼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새벽부터 자리를 지키느라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뒤늦게 울음을 터뜨린 오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오매가 말했다.

 

"66년 동안 너무 화나는 일이 많았어."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한 소장 지리산은 상담소 활동가들의 사진이 한겨레 지면에 실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오후 7시, 안국역 5번 출구 서울노인복지회관 앞에서 헌법재판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환영 집회 <더이상 낙태죄는 없다>가 진행되었다.

 

솔직히 나는 환영 집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분노를 터뜨리기 위해서라면 다들 먼길 마다하고 달려오겠지만, 굳이 모르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달려오는 참여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던 것이다. 내심 활동가들만의 소박한 집회가 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모여들었다. 우리 상담소 활동가들은 집회에서 모금함 돌리는 역할을 맡았었는데, 예상보다 인원이 많아서 역할분담을 다시 해야 했다.

 

무대 위에서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 나영이 말했다.

 

"집회 신고할 때 경찰은 '500명 이상 모이면 도로를 넓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 무대 위에서 인원을 보니, 500명, 충분히 넘습니다. 경찰은 약속을 지키십시오!"

 

폴리스라인이 움직였다. 그래도 대열은 길게 이어졌고, 인도에도 사람이 가득 서있었다. 준비한 슬로건이 부족해서 스탭들은 '슬로건 어디서 받냐'는 질문에 계속 안타까운 답변을 드려야 했다. 모금함에는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 만원 짜리 지폐가 하나둘 쌓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만 원짜리 지폐를 넣어주시는 분도 계셨다. 모낙폐에서 회계를 맡고 있는 나는 더더욱 신이 났다. 대중집회와 기자회견을 연달아 진행하다 보니 사업비가 모자라서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슬로건도 더 많이 인쇄할 수 있었을 텐데!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그동안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서 자유발언을 해주셨던 분들이 다시 무대에 올라와 벅찬 감정을 나눠 주시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스탭이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참여자들에게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집회를 마칠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이제 뭘 하면 좋겠어요?'라고 묻자 참여자들이 '춤춰요!'라고 소리쳤다. 아모르파티, 다시 만난 세계 등 노래가 울려퍼졌다. 1,000여 명의 참여자가 순수한 기쁨과 희망으로 춤을 추었다. 주변에 사람들과 하이터치(서로 손바닥 마주치기)를 하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축제가 끝났다.

 

ⓒ노동과세계 정종배

다음날인 2019년 4월 12일 오후 2시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안젤라홀에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기자간담회 <더이상 낙태죄는 없다>가 진행되었다. 전날 기자회견에서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면, 기자간담회는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검토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의 주요 의미를 짚고 여러 쟁점에 대한 모낙폐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였다. 

 

기자간담회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바로 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 나영, 문설희, 제이가 "헌법재판소 결정에 관한 세부 입장과 향후계획"을 발표했다.

 

이어서 위헌소원 공동변호인단인 류민희 변호사가 "헌법재판소 결정의 의미와 시사점"에 대하여 발언했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이자 산부인과 의사 오정원이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의 보건의료 정책적 과제와 방향"에 대하여 발언했다. 

 

이어서 질의응답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앞으로의 입법 과정에서 국가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의의를 분명히 인식하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제대로 된 법·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주수 제한'이나 '허용 사유 추가'와 같은 협소한 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당사자의 성과 재생산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 등을 보장하기 위한 포괄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프로라이프가 주장하고 있는 '신념에 따른 거부'는 의료 윤리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침해할 위험성이 있다. 이를 용인할 경우 특히 '분만취약지'라고 불릴 정도로 의료 접근권이 떨어지는 지역은 사실상 임신중지가 불가능하게 되거나 불필요하게 지연되어 당사자의 부담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4월 12일 기자간담회

엄밀히 말하면 아직 낙태죄는 폐지되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형법 '낙태죄'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헌법불합치를 선고하여 입법자들에게 변화의 책임을 넘겼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면 입법부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이제부터는 입법 운동을 통해 낙태죄를 폐지하고 성과 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가야 한다. 입법자들이 또다시 임신중지를 '처벌'하거나 '허락'하는 방식으로 법을 만들지 못하도록 꾸준히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형식적으로만 '낙태죄'를 폐지하고 모자보건법, 의료법 등을 통해 주수 제한, 상담의무제, 숙려기간제 등을 두어 사실상 임신중지를 어렵게 만드는 법·제도가 도입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도 있다. 

 

이미 정의당은 지난 4월 15일, 임신 14주를 경과한 임신중지는 허용 사유를 두어 예외적으로만 허용하고 임신 22주 이후부터는 '심각한 건강상의 위험'이 있는 경우에만 허용하며 이를 어길 경우 의료인이나 시술자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발의하였다. 이에 모낙폐는 즉각 항의 성명을 발표하여 "(해당 발의안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 취지에도 거스르는 방향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요구해 온 방향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력 규탄하였다.

 

여성의 기본권 훼손하고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과 규제를 존치시키는

정의당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 규탄한다!

 

성명서 전문 보기(클릭)

 

우리가 이뤄낸 승리의 기록이 왜곡되거나 퇴보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지지와 연대를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마지막으로 여성인권운동에 연대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후기를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앎이 작성하였습니다.>

 

#낙태죄는위헌이다 #낙태죄는폐지됐다 #낙태죄폐지_우리가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