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별의 바톤을 이어받아 지리산에서 보낸 수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의 후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이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은 6월 29일 수요일인데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아직 기억이 생생하거든요. 너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다 온 탓인지, 그만큼 꿈같기도 합니다.
6/15
수요일 오후에 저는 일을 열심히 했답니다. ‘워크’스테이라는 이름으로 내려갔으니 본분에 충실했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보기와 다르게 시끄러웠습니다. 이틀밖에 남지 않은 시간, 어떻게든 업무를 빨리 처리하고 즐겨야한다는 생각에 꽤 초조했어요. 이미 목요일 일정도 짜 놓은 상태였고요. 지리산 이음에서 저희 참여자들을 위해 자전거까지 새로 구입하셨다는데, 안 탈 수 없잖아요?🙄
전날 닻별과 하루종일 회의를 했더랬지요. 요즘 상담소는 조금이라도 더 여러분과 친해질 수 있도록 여러 고민을 하고 있어요. 어디에 가야 우리 상담소를 응원해주실 분들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상담소의 활동을 더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자원활동가 분들이 효능감을 느끼고 참여를 이어가실까.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고, 레퍼런스를 찾아 정보의 바다를 헤맸습니다.
문득 창 밖을 내다보니 며칠동안 흐렸던 하늘이 개고 있었어요. 들썩의 마당에는 벤치와 테이블이 있는데요, 피크닉을 해야할 것 같은 그 자리에 노트북을 들고가 앉았습니다. 눈앞에 탁 트인 전경이 정말 멋있었어요. 지리산의 녹음을 보며 일을 하자니, 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업무 환경에 얼떨떨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해보겠나 싶어 정신줄 잡고 집중했어요. 그런데 자연이라는 존재가 참, 사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나봅니다. 지리산의 품 속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하고 편안했습니다.
6시에는 칼같은 퇴근을 하고 닻별과 마을 어귀의 실상사에 갔습니다. 들썩에서 일을 하다보면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는 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사찰은 제 생각보다 꽤 넓었고, 하늘이 탁 트여 시원했어요. 매일 아침 이곳에서 눈을 뜨는 스님들은 어떤 기분으로 하루를 맞을까 궁금했고 부러웠습니다.
마침 7시를 알리는 타종이 시작되었습니다. 묵직한 소리가 뼛속까지 울렸고, 스님의 염불 소리가 들렸다가 묻혔다가 했습니다. 실상사의 종소리가 이렇게 온 마을에 퍼지는구나 생각하며 사찰을 한 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6/16
목요일. 닻별은 온라인으로 종일 회의가 있어, 저는 오후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혼자 자전거를 탔어요. 오랜만에 잡아보는 자전거 핸들에 잠시 휘청거렸지만,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더 설레더라고요. 지리산 이음의 활동가 자유의 배웅을 받으며 힘차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시내에 자리한 ‘찬장과 책장’이라는 작은 책방이었는데요. ‘감꽃홍시’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운영하는 곳이에요. 빈티지 찻잔, 수공예품, 굿즈와 함께 독립출판물, 인문학 도서, 중고책 등을 주로 다루는 곳입니다. 글만으로도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 떠오르지 않나요? 저는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공간에 반해버려서, 계획과 다르게 한 시간 정도 머물렀어요. 편하게 앉아 눈길을 끄는 책 몇권을 주르륵 읽어내렸습니다.
산내에 머물며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가는 곳마다 책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공용 워크스페이스인 들썩에도, 카페 토닥에도, 책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작은 집에 살고있는 터라 책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가지런히 꽂힌 책에 둘러싸여 있는 것 자체가 참 좋았습니다. 덕분에 평온하고 차분해진 마음으로 일과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찬장과 책장’을 나와서는 산내면을 가로지르는 천을 따라 쭉 달렸어요. 밭에서, 논에서 일하는 주민들과 어제 둘러봤던 실상사를 지나치며 바람을 맞았습니다.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던 마을의 풍경이 자전거 위에서는 또 다르게 보였어요. 찬찬히 살피고 눈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걷는 게 최고지만, 보다 먼 곳을 내다보며 빠르게 훑는 것도 매력이 있더라고요. ‘빨리빨리 서울의 삶’의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짧은 자전거 여행의 끝은, 마을 농부들이 수확한 농산물과 주민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판매하는 느티나무 매장이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타기관 활동가로부터 이곳의 크림치즈빵이 정말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정말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욕심내지 않고 두 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닻별과 함께 먹으려다 참지 못하고 먼저 먹어버렸는데요, 진짜 맛있습니다. 욕심낼껄, 하고 후회했어요).
닻별은 일을 마치고 자유와 다른 참여자들과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하여, 저는 대충 김치볶음밥을 해먹었어요. 마당의 평상에 누워 뒹굴대고 있는데 닻별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내향형 인간(저)이 살짝 긴장할만한 연락이요.
“저희.. 여여재 거실에 술마시러 갈 거 같아요”
웬걸, 술자리는 정말이지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자유와 모든 참여자, 그리고 숙소 여여재를 꾸려가는 바람이 함께 작은 상 주위에 둘러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낯을 가리는 저는 최선을 다해 듣고 웃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습니다. 지리산에 오기를 잘 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활동가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자유와 바람에게 이곳에서의 삶을 묻기도 했습니다. 알고보니 바람은, 전에 환경 단체에서 일했던 선배 활동가였습니다. 돌고 돌아 한 자리에 모인 인연이 참 신기하지요? 저는 5년 후, 10년 후에 어디서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6/17
금요일,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숙소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바람이 보이지 않았어요. 문자로 인사를 남겨야하나, 아쉬운 마음이 드는 찰나에 그가 땀을 흘리며 나타났습니다. 저희를 생각하며 왕보리수와 블루베리를 따 온 것이었습니다. 붉고 푸른 열매에서 바람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기를, 인사를 나누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아침에는 다같이 뱀사골로 잠시 쉬러 갔어요. 가물어서 수위가 낮고 바위가 드러나 있었지만, 그래도 며칠 비가 왔다고 발을 담그고 물을 튀기기에는 충분했습니다. 발이 시려워 뻐근할 정도로 차가운 계곡물을 느끼며, 햇볕에 따끈하게 데워진 바위에 누웠습니다. 지리산의 하늘이 참 예뻐서 계속 보고 싶었는데, 햇살이 너무 강해서 눈이 부셨어요. 가져간 모자를 얼굴 위에 덮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다가, 그냥 몸을 일으켜 앉기로 결정했지요.
사실 저는 가뭄이 얼마나 심한지 실감하지 못한채 지리산에 내려왔어요. 수도권에 사는 제게 비가 온다는 소식은, 무슨 신발을 신을지, 조금 일찍 출근할지 정도의 고민에 그쳤거든요. 실제로 천과 계곡이 가문 걸 보고서야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과 지방에는 이런 차원의 정보 격차도 생기는구나, 조금 씁쓸했어요. 우리가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방에 연고가 하나도 없는 저는 정말 어떤 아이디어도 떠올리지 못했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이야기 나눠보고 싶네요.
점심으로 콩국수와 열무국수를 시원하게 먹고 들썩에 돌아와, 우리는 사진을 꺼내보며 회고를 나눴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국 곳곳에서 모인 동료 활동가들과 친밀감을 쌓을 수 있었어요. 이런 동료가 있다니, 마음이 든든해지고 용기도 났습니다. ‘활동가’라는 직함을 얻은지 반 년도 되지 않은 제게,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는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입체적인 시각을 배우는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공익을 추구하는 일하고 있다니, 여러분, 세상은 아직 살만 해요!
집에 돌아갈 때는 일부러 남원에 들렀습니다. 닻별과 페미니즘 책방 ‘살롱 드 마고’에 가 보기로 했기 때문이지요. 가지런히 꽂힌 책을 찬찬히 살피고 있는데, 낮은 책장에 걸린 패브릭 포스터에 눈을 뺏겼습니다. ‘강간문화 박살내자’, ‘가부장제 깨부수자’! 잠시 떠나왔던 사무실의 제 자리가 떠올랐어요. 제가 왜 상담소에서 활동하기로 했는지,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해야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다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산내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안식처삼아 힘껏! 뛰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짧은 일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짧았던만큼 마음 속에는 긴 울림이 남았습니다. 또 가고 싶어요. 제 감정선만 따라가는 일기같은 후기이지만, 억지로 무언가를 설명하기보다 제가 느낀 것을 솔직하게 담아내는게 읽는 이로 하여금 더 와닿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로 그곳에서 제가 체감한 즐거움과 평온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시고, 부디 지리산과 산내에 직접 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과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매력적인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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