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25주년 기념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_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알아야 할 8가지
4) 언론은 어떻게 성폭력 피해자를 '꽃뱀'으로 둔갑시키는가
글 | 어진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활동가)
나는 성폭력피해를 겪은 피해자를 상담하고 사건지원 하는 활동가이다. 그래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진짜 피해자, 가짜 피해자, 고소녀, 꽃뱀, 무고녀' 등 다양한 피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각 언론사마다 성폭력보도 가이드라인이 배포되고, 언론이 성폭력을 조장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성폭력피해자들이 흥미위주의 성폭력사건 보도로 재차 피해를 겪고 있다고 토로한지도 꽤 되었는데 세월은 어디로 비켜간 것인지. 새로운 기법을 보유한 '신종 꽃뱀녀' 운운에, 이 꽃뱀녀를 빨리 알아채고 '자기방어'할 수 있는 매뉴얼까지 떠돌아다니는 요즘. 내가 접했던 10년 전의 사건(이하 인용 사건)이 이렇게 다시 오버랩 될 줄이야.
"피해자 A는 인터넷을 통해 싼값의 월세방을 구했다. 시세보다 싼 값에 월세방을 주겠다는 B가 나타났고 계약을 위해 방을 보러 갔다가 강간피해를 입었다. B가 월세로 내놓은 방은 친구의 방으로 확인되었다."
(본 사례의 인용은 피해자로부터 동의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크고 작게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 내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가해자인 B가 있지도 않은 방을 월세로 내놓고 세입자를 기만하여 유인, 강간한 사건으로 읽히지 않는가? 하지만 피해자 A는 자신의 사건이 언론에 기사화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기사는 사건의 자잘한 정황들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 피해자가 20대 여성이라는 점
- 피해자가 방을 구할 때 사진을 게시했다는 점
- 미모가 빼어났다는 점
- 계약을 위해 만나 술을 마셨다는 점이 포함되면서 피해자는 '꽃뱀', '무고녀'가 되었다.
- 온라인 거래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 방을 구하는 사람의 사진을 올리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점
- 특별히 남성 세대주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
- 퇴근을 하고 저녁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
- 시세보다 싸게 방을 주는 것이 고마워 밥을 먹으며 반주를 한 정도라는 점 등은 어떤 기사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사는 아래와 같이 도배되었다.
A사: 20대 여성 본인 사진 올려 싼방 구하려다 변...
B사: 신종 꽃뱀, 싼방 구하는 척 하며 접근
C사: '싼방 주겠다' 성관계 후 돌변한 세대주 고소
D사: 미모의 여성, 방 계약 위해 만난 술자리서 성폭행
어떤 생각이 드는가? 최근 접하는 성폭력 관련기사의 어떤 지면과 겹치지 않는가?
성폭력피해를 겪고 나서 성폭력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다수 피해자들은 사건이 언론에, 주변인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 검찰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들의 '엄선된' 기준-'선정적이고 특이한 사건'을 보도하라!-에 의해 성폭력 사건은 알려진다. 피해자는 사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저렇게 흔들린다. 내가 겪은 성폭력사건이 기사화되었는데 댓글에 무심하고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있지도 않은 방을 있는 것처럼 속인 가해자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혀 없는 언론과, 이 기사에 댓글을 단 수많은 사람들에 피해자A는 분노했다. 문제의 발단은 오롯이 '사진을 올린 피해자, 더구나 예쁘기까지 했던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여성'에게 돌아갔다. 언론은 교묘히 가해자의 상황설명과 변명으로 가해동기를 이해하게 만들었고, 성폭력 상황을 있을 법한 해프닝으로 희화화했다. 피해내용을 자세히 묘사해 선정적으로 보도했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여성 개인의 예방을 강조했다. 나는 이 때문에 기사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폭력 관련기사는 당사자인 성폭력피해자가 본다. 당사자가 아닌 또 다른 피해자도 본다. 앞으로 성폭력피해를 겪을 수 있는 사람도 본다. 성폭력피해자의 곁에 있는 사람도 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본다.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학습하고 인식한다. 은연중에 얻게 되는 '피해자가 잘못했네' 라는 통념, 그것을 우리는 계속 배우고 있다.
촌스럽다. '꽃뱀' 따위. 정말 언제부터 들었던 '꽃뱀'인지 모르겠다. 급변해가는 세태를 반영하여 새로운 유인기술을 습득해가는 '신종꽃뱀'이 탄생했을 듯싶다. 사람들의 성폭력 통념을 알고, 통념을 자극하는 기사. 이제 우리가 새로운 댓글을 달아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가해자가 왜 시세보다 싸게 방을 내 놓았나요?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건 아닌가요?", "왜 가해자가 친구 방을 자기 방이라고 속였나요? 뭔가 작정을 했나 보네요." 너무나 당연한 질문과 답을 피해자는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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