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한 언니'는 페미니즘 콘텐츠 비평 소모임입니다. 매 달 모여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영상, 영화, 연극, 책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콘텐츠 선택과 비평의 주요 포인트는 내가 어떤 언니에게 반했는지!
한 지붕 세 여자, 서로의 곁에 서다
세 여자가 한 집에 산다.
집주인 상미는 부유한 사모님이다. 남편이 사준 명품 백도 많다. 적당히 호들갑스럽고 오지랖도 넓은데, 그 오지랖을 뒷받침해줄 재력도 충분하다. 상미의 집 반지하에 사는 정희는 인터넷으로 신발을 판다. 매일 새벽부터 일을 하면서 억척스럽게 먹고 산다. 힘들게 살아왔지만 마음은 둥글다. 정희의 딸 민서는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다. 상미의 아들인 현수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 동기이다. 애교도 많고 사람들을 잘 따른다.
연극 <두 줄>의 세 주인공은 이런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면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당차고 씩씩하고 귀엽기도 하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모두 같은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성폭력,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원치 않는 임신. 그것이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이유이며, 이 연극이 직면한 여성들의 현실이다.
마음 속의 어두움은 왜 피해자를 향할까
상미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춘천으로 놀러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무리는 끈질기게 따라붙었고 같이 술을 먹자고 했다. 술을 마시다 깨 보니 옆에 남자가 자고 있었고, 생리가 끊겼다. 아버지와 오빠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컸던 상미는 빨리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그래서 서둘러 결혼을 했다. 그러나 새 가족은 다시 지옥이었다. 남편은 술을 먹으면 후라이팬을 휘둘렀다. 남편에게 배를 걷어차여 상미는 첫 아이를 잃었다.
정희는 고등학생 때 독하게 공부를 했다. IMF로 집안이 파탄 나고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보란듯이 잘 살고 싶었다. 결국 좋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교회 부목사가 등록금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결코 공짜는 아니었다. 몇달 뒤 임신을 한 정희에게 그는 “내 아이인 줄 어떻게 아냐. 너처럼 몸 함부로 굴리는 여자 말을 어떻게 믿냐”고 했다. 그렇게 정희는 민서를 가졌고 엄마가 되었다.
민서는 대학 생활이 즐겁기만 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현수에게 업혀서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현수와 키스를 했다. 키스까지는 해보고 싶었지만 딱 거기까지만 바랬다. 그러나 현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싫다고 한 건 부끄러워서 한 말 아니냐. 여자가 같이 술 먹고 키스하는데 남자가 어떻게 참냐. 위험한 때는 여자가 알아서 조심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임신 테스터를 샀다. 두 줄이었다.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은 ‘미상’이었다. 초연과 달리 새로 등장한 배역이기도 한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때로는 상미의 마음을 때로는 정희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가끔씩은 민서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주인공은 참 덤덤하게 말을 하는데 미상이 무대 위에 나타나 “답답해! 답답해!”라고 외치거나 “(뱃속에 있던 나를) 지켰어야지!”라고 꾸짖거나 아예 드러누워 울부짖는 식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를 낳은 여자도 아이를 잃은 여자도 내면에서는 같은 고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고통은 자기 혐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상미는 마음 속으로도 남편을 욕하지 못한다. 대신 남편의 폭력을 피하지 않은 자신,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못하는 자신을 미워한다.
사실 연극 내내 이러한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관객으로서도 쉽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에게 감정 몰입될수록 그만큼 슬프고 무서웠다. 연극에서 남성의 폭력은 시각보다는 청각적 효과로 많이 나타나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나 벨트를 벗는 소리, 망치 소리가 모두 엄청나게 소름 끼쳤다. (아마 피해자 상담을 하는 활동가들이 이런 마음일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 연극의 여자들은 서로의 곁을 쉽게 참 잘 내어준다. 남편한테 맞다가 도망쳐온 상미에게 정희가 “여기 내려와서 자주 놀자”고 말한다. 힘들었던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짓는 정희를 상미가 포근하게 안아준다. 임신을 한 딸 민서를 정희가 부둥켜안아주고 밥을 차려주고 이불을 덮어준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들이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어코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연극의 결말 부분에서 세 사람은 각자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한발짝 나아간다. 남성의 권력을 무너뜨리려 나서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뒤로 ‘미상’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은 더 시궁창, 그래서 더 아름다운 포옹
연극을 보고 나서 뒤풀이를 하면서 감상을 나누었다. 사람들은 반응이 조금씩 달랐다. 너무 참혹한 상황을 보기가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결국 주체적 선택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좋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 피해의 상황에 좀 더 몰입했을 것이고, 후자는 저항의 서사를 좀 더 눈 여겨 보았을 것이다.
현실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떨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들 “현실은 더한 시궁창”이라고 말했다.
일단 주인공들은 모두 서로의 사정을 쉽게 공감하고 함께 연대하는 ‘품이 넓은 사람들’인데, 현실의 피해자들은 그렇게 마음이 건강하지 않다.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은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의 고통을 호소할 뿐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안아줄 수 없다. 심지어 서로에게 선을 긋고 다투기도 한다. 그것 역시 고통받는 사람 나름의 생존법이겠지만, 때로는 이런 방식이 다른 여성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기기도 한다.
한번의 용기로 문제가 사라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오히려 더 큰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2차 가해자들이 나타나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 법적 처벌은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윤중천 성폭력 무죄’ 기사를 읽고 있다.) 연극에서도 여성이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가 되는 상황을 보여주지만, 그나마 그는 미상을 떨쳐내기라도 했다. 현실에서는 그조차 힘들 지 모른다. 여러 부정적 감정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용감하게 나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고마운 일이다. 게다가 이들이 서로의 곁에 함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자 기적이기도 하다. 연극을 함께 본 뒤 나눴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엄마도 저랬으면”이라는 것이다. 현실은 지옥이지만, 저런 엄마 혹은 저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그 지옥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을 본 모두의 소감은 “더 넓은 극장에서 공연해서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진짜 그렇다. 연극이 더 흥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자를 안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면 모두 ‘꽃뱀’이라고 낙인 찍는 목소리에 함께 저항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의 상미와 정희, 민서가 더 행복해지면 정말 좋겠다.
<이 글은 소모임 참가자이자 이번 모임의 리다(leader) '열쭝'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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