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있었던 8세 아동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만취상태를 주장하였고, 재판부는 음주에 의한 심신미약을 인정하여 감형해 주었습니다. 술마시면 감형, 성폭력 범죄 판결문을 많이 보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주 보게 되는 양형 이유입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가능하냐구요? 성폭력 범죄가 억제하지 못한 성충동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보는 뿌리깊이 박힌 잘못된 생각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해자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뻔뻔하게 주장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피해자로 지목했고, 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고, 피해자를 협박하여 범죄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계획적/악의적 범죄의 전형적인 행동들이지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통계에 따르면 직장내성폭력이 1/4 정도를 차지합니다. 직장 상사-부하, 선후배 사이에 발생하는 성폭력이 많다는 것이지요. 친족성폭력 비율도 10%를 훨씬 넘습니다. 양육자가 어린 아이들에게 휘두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악용하는 가해 행위지요. 성폭력은 이렇듯 사회적 힘이 불평등한 관계에서 주로 발생합니다. '성충동' 운운하는 것은 아주 전형적인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10월 26일) 오후에 성범죄 양형기준을 검토하기 위한 임시위원회가 특별히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오전에 한국성폭력상담소 외 35개 단체는 음주를 심신미약이나 우발성의 이유로 인정하여 죄를 가볍게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서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에 동의하는 시민들 5,800 여 명의 서명도 받아서 같이 제출하였습니다. =>의견서 보러가기
지난 해에 처음 성범죄 양형기준을 마련할 때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음주'가 결코 감형사유가 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습니다. 현장의 의견이 수렴되지 않은 채, 지금도 이런 판결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분노할 일입니다.
이번만큼은 법조인들이 부디 현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음주상태'를 양형감경 시 절대 고려하지 못하도록 원칙을 명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폭력 피해 앞에서 감히 술핑계를 대며 성충동 운운하는 작태와 가해자가 가볍게 처벌받는 일 따위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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