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
BSH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책자 형태인 [나눔터]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분은 [회원가입]을 클릭해주세요. |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를 보면 작중 주인공인 김지영은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 극복한다. 내 삶에서 아주 큰 사건이었던 성폭력과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후에 난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하며 스스로 괜찮은 척 해왔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이 것을 완전히 극복했고 또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나눔터의 작은 공간을 빌려 생존자의 목소리를 내어보고 더불어 나 자신을 또한 치유해 보고자 한다.
나는 생경한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중도장애인이 되었다. 중대한 질병이었지만 젊은 나이라 너무 아쉬웠고 또 개인적으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수년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왔다. 어느 병원에서 재활을 받는 중에 환자로 지정되어 참여했다가 수십 명이 있는 세미나 장소에서 심각한 언어성폭력을 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워낙 치료가 급했기에 책임자의 정중하고 간절한 사과만 받고 그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고, 병원에서의 특히 재활치료현장에서의 성폭력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 후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한 곳에서 다시 신체적 접촉에 의한 성추행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건강의 악화로 그것이 가해자의 고의인지 미필적 고의인지 과실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계속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또 한 사람의 약자이므로, 다른 의사 선생님과 치료사 선생님들에게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으므로 난 건강을 위해 양심을 비겁하게 묻었다
하지만 그 물리치료사의 석연치 않은 행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다른 선생님들과 환자, 환자 보호자, 간병인들의 증언과 목격담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증언은 한둘이 아니었다. 물리치료 여자 실습 학생들에게 어깨를 주무르라 하는 등의 수차례의 은밀한 성폭력. 실습점수가 걸려있는 학생들이 거절할 수 없음을 안 가해자의 권력과 지위를 남용한 행위. 하지만 이 사실을 학생들을 파견 보낸 그 학과 교수님들과 학생 부모님들이 아셨더라면 별일 아니라 넘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또 중증장애인인 어린 학생에게 성적수치심을 주는 무례한 행동과 특히 인지가 없는 할머니들만 골라서 치료 중 성추행을 일삼은 행위(행위의 내용은 생략하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환자, 간병인 등 목격자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난 후 일련의 가해자의 행위가 확정적 고의임 확신했다.
그 치료사의 안하무인격 행동과 반성 없는 고압적인 태도가 이어지자 나와 다른 피해자, 목격자들은 병원에 피해 사실을 가감 없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2차 가해들. 수치심을 무릅쓰고 그런 내용의 사실을 알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무고죄와 명예훼손죄 등으로 보복성 역고소를 당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용기 있게 말한 것에 대해 음해 혹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른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심히 놀라웠다. 내가 하는 말이 하나의 음해가 될 수 있다는 한 담당 여성 직원의 생각 없는 언사는 내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음에도 그저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일부 남성 동료들의 행동에 분노가 일어났다. 인권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병원의 성인지 감수성이 그 정도 수준인 것에 크게 실망했고 통탄스러웠다.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손해 배상으로 보상받는 것을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으나) 나와 피해자들은 그 어떠한 금전적 보상과 치료기회의 획득을 바라지 않았고 또 타인의 교사로 인하여 혹은 남에게 이용당하여 신고, 고소, 고발을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고, 또 그 정도로 정의롭지도 않다. 단지 내가 입은 피해와 목격한 ‘진실’을 ‘진심’으로 알린 것일 뿐이었다. 비교할 순 없겠지만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을 미투(MeToo)한 김지은씨의 2차 가해 상황이 이런 것이었을까?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의 최후 보루인 병원에서조차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우리 시대의 성인지 감수성의 부재에 개탄스러웠다.
그 후 또다시 가해자의 부인이 병원의 어느 기도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주자(?)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내가 치료를 한 번 더 받기 위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기도를 한 시간이나 ‘들려주는’ 명백한 2차 가해를 했다. 나는 그 당시 정말 그 부인이 믿는 신이 존재하신다면 나를 그 가해자를 신고, 고소, 고발하라고 전국의 수많은 병원 중에 굳이 이곳에 보내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감사기도를 드렸다. 나를 이곳에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내가 병원에서 내쳐지고 평생 걸을 수 없어도 할 말을, 아니 해야 할 말을 하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다고, 바로 그 여자와 내가 믿는 그 하나님께. 잘못에 대한 명백한 인정과 진심 어린 사과는 못 할망정 전혀 반성하는 태도 없이 자신들은 억울하다며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며, 그것도 신과 신앙을 결부시킨 2차 가해는 나에게 실로 큰 유감이었다. 난 심한 충격으로 참을 수가 없었고 그 후 정신적으로 큰 혼란을 겪으며 건강이 악화하여 힘들고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양심적이고 정의감에 투철한 병원의 의사 선생님들과 다른 선생님들, 일부 직원분들의 용기 어린 결단으로 가해자는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나의 병원 생활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병원에 다니면서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데 나 혼자 예민해져 그 성추행 사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와 병원의 지나다니는 사람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또 지난 1년 간은 까닭 없이 차오르는 분노와 무기력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병원 측의 배려와 선생님과 다른 환자들의 도움으로 서서히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하고 있다. 또 정신적 회복의 일환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상담과 행정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적용하는 성폭력피해자전문상담원 자격을 취득하게 된 것은 실로 큰 소득이었다.
최근 가해자가 다시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다른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사람들은 그 가해자가 향후 절실한 반성과 함께 자신을 돌이키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지, 아니면 똑같은 잘못의 반복으로 완전한 법의 심판을 받을지는 오롯이 그의 몫으로 남겨졌다고 일견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가해자는 그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만약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이제부터는 나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탓이요, 책임이다.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했다. “악을 보고 침묵하는 그 자체가 악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본회퍼만큼은 정의롭지 못해도 인간으로서 일말의 양심과 최소한의 도덕성은 지닌 채 살아가야 한다.
서두에서 말한 <82년생 김지영>의 결말로 돌아가 김지영이 글쓰기를 통해 병을 고치고 자아상을 회복해 가듯이 글쓰기에는 실로 놀라운 힘이 있다. 이 짧은 글을 쓰는 중에도 나 자신이 치유되어 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 책의 프롤로그에서 흠결 없고 상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구절을 읽고 그 말이 내 폐부에 직접 와닿았다. 나 또한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앞으로 성폭력 피해자라는 하나의 사회적 약자의 법적 조력자가 되는 소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성폭력의 포로가 되어 자신의 동굴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와 놓임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사명. 이를 위해 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 무기력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삶의 현장을 다시 한번 살아볼 것 다짐하는 바이다.
나와 또 다른 피해자들, 특히 인지가 온전치 못한 할머니들의 생각과 마음에 완전한 치유가 깃들기 바라며, 또한 나와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해 온전한 용서를 하게 되길 바라며, 또 그동안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이 어려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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