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담당 성문화운동팀 메일 (f.culture@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 안내 보기] 책자 형태인 [나눔터]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분은 [회원가입]을 클릭해주세요. |
어렸을 때부터 자전적인 소설을 쓰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 진지하게 출판사에 전화도 해봤을 정도로 진심이다. 그 때는 밝은 미래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점차 극복해 나가는 우리 가족 내용을 담고 싶었고 나의 연애와 결혼, 2세의 행복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생겼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성폭행을 당했다. 물건을 잃어 버렸다며 내게 도움을 청하던 그 학생은 비상계단으로 가니 표정을 바꾸며 물건을 가져간 사람이 나라고 말했다. 어린 마음에는 내가 정말 잘못한 줄 알았다. 물건을 가져간 줄 알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혼자 비상계단을 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해자는 고등학생. 지금 생각해봐도 기가 막히 지만, 당시 우리 엄마는 성폭행을 당한 게 큰 트라우마로 남지 않게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설명해 줬다. 그래서 난 초등학교 때 아무런 트라우마 없이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물론 지금은 엄마에게 사과를 받았다. 가끔은 울컥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중고등학교 때이다. 친구를 통해 처음 성인 영화를 접했다. 정말 혼란스러웠다. 그 이후로 나는 남자아이들이 무서웠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는 한 자리를 제외하고는 이성끼리 짝꿍이 되었는데, 자리 바꾸는 전날이면 늘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천운이 내게 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무심했다. 1년 내내 남자와 짝을 했다. 몇 명은 눈도 못 마주쳤다. 토론하라는 시간은 정말 엿같았다. 한 명도 힘든데 뒤돌아서 내 책상에 팔을 가져다 대는 것. 그 자체가 혐오스럽고 무서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 <소원>을 봤다. 처음 공황을 느꼈다. 숨이 안 쉬어 졌다. 눈물만 났다. 친구들에게는 “주인공 실제 이름이 ‘이레’라서 내가 감정 이입을 더 해서 그래”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그게 아닌데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20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행복했다. 둘이 있는 시간만 빼고 말이다. 둘이 남겨질 때면 늘 불안했다. 남자라는 이유가 다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접하고 많은 게 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N번방 사건으로 다시 한 번 트라우마가 올라왔다. 두려움에 잠을 못 이뤘고, 끊었던 수면제를 찾기 시작했다.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날 때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초기 상담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반복했다. 상담소는 언제나 열려있고 진입 문턱이 낮았지만, 내가 정말 작았다. 내가 너무 작아서 문턱을 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겨우 상담을 시작했을 때 사실여부를 물어보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의 힘듦의 정도를 평가 받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함께해 주었다.
상담소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다녀왔다. 1시간 대화가 얼마나 효과 있을까 싶었지만 23년간 안고 살았던 것들이 일부 가벼워졌다. 6개월 간의 상담은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은 물론이고, 건강한 연애를 하는 방법도 많이 배웠다. 부모님과 함께 상담을 하고 나면 지난날 서운했던 감정도 풀어졌다. 진심어린 사과도 받았다. 덕분에 지금은 나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되었다.
나와 비슷한 생존자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 상황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글’이다. 문학적인 글, 논리적인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그냥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괜찮다고 이야기 하지만 막상 비밀 메모장에 오래 전부터 적어 놓은 내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없는데 용기를 불어 넣어준 한국성폭력상담소에게 정말 감사하다. 계획했던 이야기에는 차질이 생겼지만 자전적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변치 않다. 나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98년생 최이레’를 내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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