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씨티-경희 ngo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1월 3일부터 6주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지은입니다. 6주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상담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며 특별한 경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모든 활동이 끝났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네요.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살짝 눌러두고, 그간 상담소에서 어떤 활동들을 했고, 그 활동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적어보려고 합니다.
씨티-경희 ngo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된 것은 우연히 수요집회에 관한 뉴스를 본 후였습니다. 단계적 일상 회복 조치로 서울 시내 집회 제한이 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요집회에 참여했다는 뉴스였는데, 뉴스 화면에서는 마스크를 낀 채 진상 규명과 책임 이행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역사를 전공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사회문제에는 예민하지 못했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원하면서도 다른 이의 아픔은 쉽게 잊어버리는 제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 모습을 깨달은 그 날, 더 이상 아무 행동도 없이 변화만을 바라고 있을 수는 없다고 다짐했습니다.
2022년 현재에도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며 사회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위계 권력의 차이를 이용한 정치권 내에서의 성폭력, 연인이라는 명목 하에 쉽게 가해지는 데이트 성폭력, 통신 매체 등을 통해 발생하는 사이버 성폭력 등 하루에도 수십 건의 성폭력 피해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성폭력’은 비단 저와도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폭력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일은 제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성단체 중에서도 페미니즘을 기조로 활발한 여성 운동을 전개하고, 성폭력 문제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인턴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1월 3일 첫 출근 날에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대한 소개와 업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인턴으로서 어떠한 업무를 하게 될 것이다! 라고 설명하는데서 그치는 오리엔테이션이 아니라, 사무국, 여성주의 상담팀, 성문화운동팀, 열림터 이 네 팀이 각각 작년에 무엇을 중점에 두고 운영되었는지, 또 올해는 무엇을 중점으로 팀을 운영하려고 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핵심 가치는 무엇인지 정말 자세히 설명해 주신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나도 상담소와 비전을 공유하는 상담소의 일원이 된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사무국 오리엔테이션 시간에는 3가지의 키워드로 나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역사, infj, 미지수라는 3개의 키워드로 저를 소개했었는데요, 제가 내향형이라 그런지 몰라도 활동가분들과 많이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아 정말 아쉽습니다.
여성주의 상담팀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가장 인상 깊었던 감이 활동가님의 말씀은 상담가와 상담자가 평등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상담자는 법률적 조언이든 상담이든 도움이 필요하고, 상담가는 그것들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담가와 상담자를 시혜자와 수혜자로 인식해버리기기 쉬운데 이를 지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장 공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문화운동팀 오리엔테이션때는 모낙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모낙폐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운동의 줄임말인지 모르고 뭐지? 페스티벌인가? 했었어요. 설명을 들으면서 아 모낙폐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운동을 줄인 말이구나! 이해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기만 하면 부끄러워집니다.
열림터 오리엔테이션을 통해서는 생활인들의 더 나은 생활환경을 위해, 그리고 생활인들이 한 단계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고민하시고 또 고민하시는 열림터 분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턴으로서 맡은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제 31회 정기총회 준비였습니다. 이번 정기총회 역시 코로나로 인해 zoom으로 실시되었는데요, 정회원 분들의 회원 명부를 정리하고, 총회 관련 우편을 발송하고, 총회 때 수여될 공로상, 용감한 반성폭력운동상의 상패를 주문하는 등 총회의 전반적인 업무들을 처리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총회 ppt를 제작하고 총회 자료집의 표지를 제작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평소에 미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은 절대 아닌데, 이상하게 이곳 상담소에서는 포스터, 카드뉴스, 표지 제작 등 디자인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활동가 분들이 너무 잘 만들었다고 칭찬해주셔서 뿌듯했습니다 :)
처음에는 정회원 분들이 모두 현장에 참석해 직접 호흡하며 총회를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총회가 끝난 후에는 아쉬움이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뿌듯한 마음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 끊김 현상 없이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정회원 분들의 열렬한 참여로 한층 풍부한 총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앎 활동가의 열정 넘치는 2022년 상담소 계획 발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총회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인턴으로서 총회에 참석하며, 상담소가 해오고 있는 정말 다양한 활동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인턴으로서 맡은 또 다른 중요한 업무는 제 1531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를 주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수요시위의 제목은 ‘우리는 듣고있는가?’로, 성폭력 생존자들의 ‘말하기’에 귀 기울여야 함을 강조한 제목입니다. 저는 수요시위의 포스터와 카드뉴스, 피켓을 제작하였습니다. 포스터와 카드뉴스에는 모든 피해자분들이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갯짓하길 염원하며 나비와 소녀상, 그리고 노란색을 활용하였습니다. 피켓에는 저희의 구호인 “피해자다움은 없다.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와 “세상은 변화했다, 우리가 상식이다” 를 나비와 함께 크게 적었습니다. 또한 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인 사회를 맡았는데요, 수요시위 직전까지 정말 정말 너무 걱정되고 떨렸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고자 이런것까지 적어? 할 정도로 자세하게 대본을 작성했습니다. 초안 원고는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닻별님과 하윤님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대본을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1월 마지막주에는 외근도 다녀왔습니다. 먼저 제 1528차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는데요, 제 152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는 정의기억연대의 주최로 고 김복동 활동가님의 3주기를 기념하며 열렸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김복동 할머니’ 라는 주제로 많은 분들이 연대발언을 해 주셨고 다 함께 추모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연대발언들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참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이 울어서 눈가가 벌겠습니다. 매우 추운 날씨였지만 모인 사람들의 열기로 마음만은 따뜻한 날이었습니다.
수요시위 참관 후에는 맛있는 우육면을 먹고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에 방문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분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던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위안소 이용 요금과 이용 시간이 적혀 있거나 일본군이 실제 사용했던 콘돔이 전시되어 있는 등 ‘위안부’로서의 생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고 박물관을 끝까지 둘러보는 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추모관에 들러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난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습니다. 수요시위를 열심히 준비하여 제 미약한 힘이나마 피해자분들과 연대하는데 보태고 싶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고 2월 16일,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관하는 제 1531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그리 춥지 않던 날씨가 점점 추워지더니 16일 당일에는 영하의 날씨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상담소가 주관하는 수요시위 날만 되면 귀신같이 추워진다는 목련님의 말에 그리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칼바람에 설치해둔 카메라가 떨어지고, 장갑을 낀 손가락 마디마디가 에일 것 같이 추운 날씨에도 많은 분들이 수요시위에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가득 채워 주신 많은 분들의 얼굴과 언론사에서 취재까지 온 모습을 보니 ‘내가 사회를 잘 볼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정말 너무 떨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너무 잘 보였는지 긴장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옆에서 닻별 님과 다른 활동가분들이 잘 할 수 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시작 직전에는 떨지 않고 침착하게 최종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막상 수요시위가 시작되고, 무대에 올라서고부터는 하나도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벅차고 행복했습니다. 모든 순간순간들이 기억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순간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sns 대학생 기자단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시온님의 연대발언이었습니다. 무대 아래에서 시온님의 연대발언을 듣는데 눈물이 나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울면 안 돼, 너 올라가서 사회 봐야돼. 제발 참아.’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되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올라 정의연 활동가분들이 시온님을 꽉 안아주는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다짐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무대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그러나 다행히 살을 어는 듯한 추위가 제 눈물을 멈추는 것을 도와, 연대발언 순서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수요시위 성명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듣기가 가진 힘’ 이었습니다. 91년 8월 14일, ‘내가 여기 있다’는 마음으로 피해 사실을 증언한 고 김학순님의 용기는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고, 최초의 말하기 이후 수요시위는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성숙한 민주 시민의 연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최초의 말하기 이후 수많은 변화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듣는 힘’ 에 있습니다. 피해자의 말하기를 존중하여 있는 그래도 듣는 행위는 곧 연대를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하기와 듣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피해자와 연대하며 정의로운 해결을 반드시 이끌어낼 것입니다.
제 31차 총회 준비와 제 1531차 정기 수요시위 준비 이외에도 상담소 전화 업무, 카드 뉴스 제작, 서류 발송, 상담소 후원 목록 엑셀로 정리 등의 다양한 업무를 맡았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6주 동안 인턴으로 근무하며 제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불합리함에 맟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단순히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치부한 문제들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위계적인 사회 구조의 문제와 여성 차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었고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 다시 생각해보니 기억나는 재미난 일들이 많습니다. 활동 중간에는 새로운 활동가 분들이 상담소에 첫 출근을 하기도 하셨고 소장 오매님과 부소장 란님이 10년 넘게 반성폭력운동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아름다운 세월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활동가분들이 순번을 정해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던 점심 시간이 기억납니다. 주로 비건식을 먹었는데 비건식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비건식’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들을 해소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10시에 이루어진 ‘아침나눔’ 시간을 통해서는 나도 상담소의 일원이구나 하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고, 다양한 여성 운동, 회의, 캠페인의 내용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낙폐’, ‘한사성’, ‘전성협’ 등의 줄임말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기도 했지만, 아침나눔을 거듭하며 이러한 용어들이 들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상담소의 언어를 배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성주의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상담소는, 상담소 내부에서도 상담소 만의 섬세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들이 누군가에게는 혐오의 표현으로 들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6주간의 활동과 소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겨울을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성남에서 이곳 합정까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출근길이었지만, 상담소의 활기찬 분위기와 맛있는 점심식사, 그리고 세상에 목소리 내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활동가분들의 열정에 힘을 얻어, 6주간의 인턴 활동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NGO 인턴십은 저에게 있어 큰 도전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인턴 생활이었고, 또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또 무슨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곳 상담소에서의 시간이 제가 추구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겠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들에 함께해주신 상담소의 모든 활동가분들, 제가 정말 많이 의지했던 하윤 인턴님, 그리고 상담소를 통해 만난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상담소와 연대하는 인턴 지은이 되겠습니다.
<이 후기는 상담소 인턴 지은 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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