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입니다.
현 정부가 내놓은 여성가족부 폐지안에 반대합니다.”
정부는 “여성가족부가 부처의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뚜렷한 대책조차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가족부가 소명을 다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조용히 할 것을 요구하며 가만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혼자 내버려져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참아왔던 아픔을 세상에 외쳤을 때, 손길을 내밀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것은 성폭력상담소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담소의 지원으로 법률지원과 정신과 진료, 그리고 심리상담을 받으며 어렵고 외로운 길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전국의 성폭력상담소들은 생존자들의 피해회복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성가족부의 소명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입니까.
정부는 여성가족부의 각종 역할을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로 이관하겠다고 합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업무 특성상 다른 부처와의 협업이 많지만, 권한의 한계로 역할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성가족부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다른 부처로 이관하겠다고 인터뷰했습니다. 권한의 한계가 있다면 조율하고 권한을 늘리는 것을 고려해야 하지 이 모든 문제가 폐지로 귀결되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폐지 후에는 더 잘해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부처의 각종 담당을 다른 부로 이관하게 되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합적 지원이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지금보다 훨씬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여성가족부가 존재하는 지금도 성폭력상담소는 넉넉치 않은 현실에서 생존자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폭력 상담소에서 치유회복을 위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예산의 문제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예산 부족 문제를 경험할 때마다 가해자들은 뻔뻔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도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눈치를 보게되는 것 같았습니다. 여성가족부가 존재하는 지금도 이럴진데 오히려 예산을 늘리고 기능을 강화하자고 하지는 못할망정 폐지라니요. 여성가족부를 폐지한다는 것은, 생존자가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연결감마저 박탈하는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의 삶에는 단순히 ‘힘들게 살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피해를 의심받고, 공격 받기도 하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하기도 하고, 피해를 회복하고 일상을 되찾기 위한 과정도 지난했습니다. 세상 모두가 가해자편에 있는 듯 했습니다. 여성폭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언제고 우리와 같은 고통을 또 다른 누군가는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피해자가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곳이 계속 남아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생존자를 위해,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를 피해자를 위해 여성가족부는 존재해야 합니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는 것은 취약한 위치에 있는 약자에 대한 또다른 폭력이자, 인권의 퇴보를 의미합니다. 정부는 더 이상 여성가족부 폐지를 명목으로 이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하십시오.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가해자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성폭력 피해 이후에도 2차 피해를 겪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더 들을 때입니다.
2022. 10. 25
19명의 성폭력 피해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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