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인가? 프로라이프 의사회(구, 진오비)라는 산부인과 의사들로 만들어진 단체가 창립식을 갖고 불법 낙태를 근절하겠다며 새로운 각오를 밝힌 바 있다. 법에 분명히 불법으로 명시되어 있는 낙태시술을 하는 병원을 색출해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드디어 병원 3곳을 선정하여 2월 3일 고발조치 하겠다고 오늘 밝혔다.
낙태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처벌을 촉구하는 고발이라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불법이며, 몇몇 예외적인 경우에만 낙태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사회경제적인 이유에 의한 낙태를 인정하는 다른 나라의 법과 비교하였을 때 매우 엄격하고 현실과도 상당한 괴리를 나타낸다. 이 때문에 현 법안자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혹자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해서 법이 잘못된 것이냐, 법을 지키지 않는 현실을 더욱 철저하게 단속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 현실이 단순히 자신의 이해관계를 이롭게 하고자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당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를 의미한다면 철저한 단속과 처벌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의 현실은 개인과 가족, 주변인, 태어날 태아 등을 둘러싼 너무나도 많은 고민 끝에 내리는 한 인간의 책임있는 결정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단속 강화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결론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 발생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낙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자연히 낙태는 줄어들 것이다. 피임을 포함한 성관계에서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원하지 않는 성관계, 미처 피임하지 못한 성관계는 줄어들 것이다. 언제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울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면, 법적인 결혼여부, 경제적 상태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고뇌하지 않고도 출산과 양육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판단하는 재판에서조차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로 판단하기 보다는 죽기살기로 저항했는지, 조금이라도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는지를 샅샅이 뒤지는 게 여성인권의 현주소다. 성을 둘러싼 여성의 권리가 이렇게 무시되는 사회에서 왜 피임결정에서 자기 주장을 다하지 못했는지, 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는지 더 설명이 필요할까?
돈이 없는 부모에게 왜 낙태했냐며 호통을 치는 것이 낙태 근절을 위한 방안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낙태 근절을 위한 방안인가? 어떻게 한 사람의 몸을 좌지우지 하고 삶을 좌지우지 하는 중요한 결단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책을 고민하기보다, 국가의 형벌권을 강화함으로써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내놓을 수 있는가?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 낙태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무조건적이고 야만적인 낙태 금지는 결국 뒷골목 낙태 조장, 심각한 여성 건강권 침해와 같은 문제를 즉각적으로 양산할 뿐이다. 당장 한국성폭력상담소에도 낙태시술에 관한 문의가 지난 1월 급증하였다.
임신과 출산, 낙태, 양육은 여성의 몸과 삶에 깊이 개입하는 사안으로서 한 사회의 삶의 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슈다. 삶의 질이 높을수록, 남녀가 평등할수록, 여성의 경제활동비율이 높을수록 출산율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 보다는, 그 나라의 사회지원정책이 얼마나 지지적이냐에 따라서 낙태율도 상당히 달라진다.
당장 의사를 처벌하고 부녀자를 처벌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가? 낙태 시술 음성화에 따른 비용 증가와 위험부담 증가, 건강을 해치는 뒷골목 낙태 조장,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출산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 외에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인가? 낙태를 줄이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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