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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시끌 상담소

[후기] '공정'과 싸우며 '공정 이후'를 살아가기

활동을 하다보면 마주하는 이슈, 사건, 사회적 상황들에 다른 언어로 대응하고 싶은데, 내 안의 언어창고가 고갈되어 있는 느낌이 들고는 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공부이겠죠. 지난 4월 12일에 진행되었던 활동가 교육에서는 <공정 이후의 세계> 저자이신 김정희원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정이라는 이름의 차별

‘공정’이 중요한 감각이자 원칙으로 강조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공정’을 주요 가치로 내세웠는데요. 공정의 표준국어대사전의 뜻은 “공평하고 올바름” 입니다. 사전적 정의만 볼 때에는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요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싶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연결되어 있는 가치는 역설적이게도 능력주의와 차별입니다. 책에 여러 사례들이 거론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된 “불공정” “무임승차” “로또취업” 논쟁입니다. (관련 기사 보기) 저자는 우리 사회의 불안정성, 불확실성이 높아졌는데 우리가 이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능력에 따라 각자도생하는 방식에 있음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1장 개별주의적 존재론). 공정은 불평등한 구조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경쟁 및 생존 원칙 같은 것이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정담론은 불평등을 정당화합니다. 권력과 자원의 분배는 특권집단의 억울함이나 피해의식의 정동을 불러일으키고(피해 입은 특권, 24p), 보편적인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력화시키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확산합니다. 우리는 왜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보다는 유지하기를 택하고 그로 인한 불안과 고통을 계속 재생산하는 것일까요? 

 

상담소가 싸우는 공정 담론

상담소의 운동 현장에도 공정 담론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양성평등’은 이미 달성되었거나 오히려 역전되었기 때문에 성차별 개선을 목표로 하는 여성할당제 등의 법제, 여성가족부 라는 성평등추진체계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인 공정 담론에 입각한 백래시일 것입니다. 성폭력 관련 법제가 여성들에게 편향되어 있고 여성의 주장으로 인해 억울한 가해자가 많다는 성폭력 통념도 공정 담론과 만나서 ‘성폭력 무고 강화’라는 정치권의 약속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성폭력 무고를 공정한 청년공약이자 양성평등공약으로 이야기했고(관련 기사 보기) 성폭력 무고 강화는 성폭력 처벌 강화와 나란히 등장해서 110대 정책과제로도 포함되었습니다. 성폭력 무고 범죄는 성폭력 범죄의 0.78%에 불과한데도 성폭력 만큼 중대하고 심각한 위상이 되었고, ‘억울한 가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비동의강간죄 반대 근거로도 등장합니다. 때로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때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로 보이지만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분석한 것처럼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무지(88p)에 근거합니다. 

급진적 자기돌봄과 새로운 보편

<공정 이후의 세계>의 2부에서는 공정 ‘이후의 세계’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요. 나와 관계와 일터와 사회를 어떻게 재조직해야하는지에 대해 여러 개념과 사례들이 나오니 많은분들이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긴 후기를 방지하기 위해 설명은 생략합니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나의 고통이 사회적 부조리 및 폭력과 연결되어있다는점을직시하고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기전까지스스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것이다.”(138)  

 

“우리의 삶의 원리이자 가이드라인이면서. 동시에 정책적 기반으로서 새로운 의미의 보편을 구상해야 한다 (중략) 즉 기존의 권력관계를 영속화하지않으면서 공통 기반으로서의 인간성을 그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로서의 보편이다”(160p)

 

 

 

짧은 다리 놓기, 콩깍지 만들기

활동가들은 차별과 폭력을 개인화하는 공정-능력주의-인권에 대한 반동을 끊어낼 수 있을지, 어떻게 혐오세력이 아니라 ‘평등세력’을 조직할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 중 하나는 ‘짧은 다리 놓기’와 ‘콩깍지 만들기’ 입니다.  

 

“사회운동이라는 게 나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처음부터 긴 다리를 놓기 어렵기 때문에 그나마 설득할 수 있는 친구를 짧은 다리부터 놔야 한다고 해요. 우리는 오히려 여기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명 씩 더 끌어 들이려는 노력을 할 수 있고, 세상을 바꾸는 담론을 더 많이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김정희원) 

 

“참여하려면 쉬워야해요. 미국에서는 너만의 pod 콩깍지를 만들어 라는 말이 쓰이곤 합니다. 콩깍지가 안전망처럼 있고 4-5개 정도의 콩들이 있는 모여있는 것인데요. 어떤 의제가 있을 때 그냥 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시위에 한번 참번 참여하고, 노래도 부르고 깃발도 들어보고. 그게 정치적 학습의 장이 되기 때문에 점점 더 참여가 쉬워지거든요”(김정희원) 

 

우리의 뿌리에서 힘을 찾기

교육 중에 뭉클해진 순간도 있었습니다. 저자님이 나혜석의 글을 공유해주셨거든요. 우리가 먼저 이 세계를 살아간 여성들 중에서도 어떤 여성들에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기를 쓰는 저는 <나혜석의 고백>을 주문했습니다)

“오드리 로드 등 제가 영향받은 흑인 여성들을 인용했어요. 그런데 쓰고 나니 뿌리 찾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국의 오드리 로드는 누구일까? 우리의 삶 자체를 탈 식민한다고 하면서 미국 학자를 인용한다는 게 스스로에게 어떤 답답함으로 다가왔어요. 차학경, 나혜석, 김명선을 다시 읽었습니다. “급진적 자기돌봄”을 설명할 때 저는 이제 나혜석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너무 많은 다층적 억압 구조 안에 있는데 그 안에서 헤쳐나오는 힘을 우리 뿌리로부터, 우리 자신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저도, 그리고 그당시 나혜석도 생각했던 것 같아요.”(김정희원) 
“나는 우선 생활 개량의 근본되는 힘을 찾아 얻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 속에서 끓어나오는, 심화하고 확대하려는 생활욕을 얻고자 하는 근본심이 생겨야 할 것입니다. [...] 그러면 이와 같이 우리들로 하여금 알게 만들고, 또 안 것을 실행하게 만드는, 이상하게 헤아릴 수 없는 근본되는 힘을 어찌하면 얻을 수 있겠습니까? [...] 누구보다 먼저 여자 자신이 자기 일신이 땅 위에 있는 것을 자각해야 하겠습니다. [...] 자기 자신의 행복을 계획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동시에 남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다시 말하면 우리 조선 여자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에게 제일 중요한 것을 잃고 살아왔습니다. 즉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생명이 있다' 하는 것을 억제하고 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 숨소리를 들어보시오. '여자도 사람이다'하는 자부심이 이상스럽게 전신에 흐르리다. [...] 이렇게 여자의 눈이 뜨일 동시에 지금까지의 자기가 불행했고 불쌍했던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불행인 역경에서 행복인 순경으로 옮기려는 본능에 따라, 여자 자신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아갈까 고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받아보지 못하던, 영원불변으로 있을 자기 자신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자주자주 느낄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면 모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 이 점으로 보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혜석의 고백> 중)

당일 저자 님과 찍은 기념 사진을 첨부하며 후기를 마무리 합니다. 교육시간에 주고 받은 힘과 다른 사회와 삶에 대한 상상을 포기하지 않고 공정 이후의 세계를 상담소도 함께 열어 갈게요!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신아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