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상담소는 4년만에 오프라인 후원의밤 <페미본색>을 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었어요. 기자단 틈 2기의 은결 기자도 참여해 페미니스트들의 뜨거운 연대를 느꼈는데요. 그 속에서 지난 경험을 떠올리고 '여성의 공간'을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공간을 가진다. 밭게 붙어 줄을 서거나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을 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아주 작고 미세하다 할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지키고 싶은 나의 공간, 누군가 허락 없이 넘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거리, 내가 나를 외부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단절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바쁜 일상에서 서로의 몸과 마음을 부닥치다보면 나의 공간이 조금씩 깎여나가기도 한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누군가의 가방이 내 몸을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하고, 악의는 없지만 배려도 없는 타인의 물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내가 지키고 싶다고 해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으로부터 멀어져야 할 때도 있다.
소중히 하는 공간에 예고 없는 손길이 불쑥 들어오는 것은 누구에게도 딱히 달갑지 않은 일일 테다. 그러니 나만의 공간을 더욱 안전하고, 온화하게 가꾸는 것을 사람들이 즐기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멀쩡한 방이더라도 인테리어 공사를 덧대는 것, 낡지 않은 침구를 좋아하는 색으로 통일하여 장만하는 것, 보기에만 좋은 쓸모를 갖춘 소품을 방 구석구석 놔두는 것. 이러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부질없이 느껴질지 몰라도, 자신의 공간을 더 편안히 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들의 공간을 떠올린다. 결혼을 한 여성은 보통 남편의 입에서 ‘집사람'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부인이자 며느리이자 어머니인 여성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자신의 온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집사람으로 불리는 여성들의 공간은 집에서도 부엌에 한정될 가능성이 높다면 그들은 왜 ‘집사람'으로 불리나. 집에 상주하고 집을 가꿔온 많은 여성들의 공간은 그 안에서도 경계지어 지곤 한다.
꽤 가난했던 시간을 지나, 아버지의 부단한 노력과 어머니의 뼈 아픈 희생을 통해 삼 남매가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때를 기억한다. 나의 공간, 여동생의 공간, 남동생의 공간이 각자의 취향으로 빼곡히 채워지는 동안 어머니의 공간은 없었다. 식탁의 한 켠에는 어머니가 주로 사용하시는 노트와 책 몇 권이 항상 올라가 있다. 식탁은 어머니가 어머니의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집 다른 구성원들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당신이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공간은 식탁이었다. 그렇게 넓은 집에서, 거실 탁자도 아닌 식탁이 어머니, 당신의 공간이었다.
집에서도 한정되는 여성의 공간이 사회에서 제약받지 않을 리 없다. 여중, 여고를 나왔던 나는 여성이 아닌 성별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기회가 적었다. 대개 여성만 있거나, 미성년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에서 생활하고 놀았으니까. 그러나 공학인 대학교에 입학하고, 더 넓은 공간에 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인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밤에 귀가할 때면 뒤에서 사부작거리는 작은 발소리에도 온 몸이 곤두선다. 길을 돌아가기 위해 잡은 택시 안에서도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리고는 한다. 혹시나 연락이 끊기면 전화해달라거나, 받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달라는 등의 내용이다. 친한 사람들 혹은 같은 동아리 사람들끼리 가지는 술자리에서도 그 내용에 한껏 자유롭기는 어렵다. 사회적으로 발생한 여성 폭력에 대해서는 흔히 말하는 ‘젠더 이슈'로 인식되기 때문에 언급조차 조심스럽다. 또 누군가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보이거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발언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남자끼리 뭐하는 거냐’라는 장난기 서린 물음에 과도하게 짜증스런 반응을 보이며 낄낄거린다거나, ‘병신', ‘불구'와 같은 단어를 추임새처럼 사용하는 것 등이다.
일상에서 마주칠지 모르는 폭력에 대해 긴장하여 움츠러든 몸을 기억한다. 습관처럼 내뱉는 혐오 표현과 타자화된 소수자를 향하는 차별에 대해서 인지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고쳐준다면 되려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지만, 혐오는 언제나 나의 일상을 불쑥불쑥 침범하여 헤집어놓는다. 그게 무례한 줄도 모르고, 무척이나 염치 없이 타인의 공간을 공격한다.
여성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날이 여럿이었다. 이야기하기 조심스럽게 여겨지는 여성의제와 사회적 폭력에 대해서 함께 말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내 커뮤니티에서 공격 받는 페미니즘에 대해서 같이 토론하고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들어간 여성주의 학회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함께 공부하며 더 많은 여성학 의제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보다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성과 약자, 소수자를 주체로 한 시위, 행사 등에 직접 참여할 수 있던 기회도 생겼고, 그 경험을 나눈 동료들과 더욱 돈독해질 수도 있었다.
나의 생각과 말을 툭 터놓았을 때, 그것을 온전하지 않더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곁에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얻게 되는 안정이 있다. 나와의 거리를 지키면서 조심스럽게 다가오고자 하는 배려를 느낄 때, 그 무엇도 혐오하고 싶지 않다는 거창한 말을 나눌 때, 나의 언어가 부정당하지 않고 타인의 언어와 함께 뒤섞여 더욱 단단한 것이 되었을 때.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의 공간이 지켜지기를 바랐다.
지난 7월부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기자단 ‘틈'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이 가닿는 범위를 넓혀준 또 하나의 계기를 가지고서, 함께하게 된 이들과 공간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8월 25일에 현장기록가로 참여했던 ‘후원의 밤' 행사는 무척이나 뜻 깊었는데,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공간이 함부로 뭉그러지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성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여서 그런지, 그곳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주의 의제에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이 공간이라면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성큼 떠올랐다. 참여자가 많은 탓에 분주한 스태프들, 술기운이 돌아 달아오른 얼굴로 크게 떠드는 사람들, 기획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관계자들, 모두가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쭈뼛거려도 먼저 웃으며 포즈를 잡아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멋모르고 사진 찍히더라도, 그게 불순한 의도로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 여성의제와 페미니즘에 대해서 크게 떠들 수 있는 공간, 카메라 앞에서도 안전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 이곳에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물론 그 공간을 벗어나서,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나의 공간이 또 침해당할지 모른다. 내가 안전한 공간에 있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의 공간을 지키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활동을 끝나고 나온 뒤 몇 블록 가지 않아서, 어느 길목 어귀에 한 중년 남성이 만취하여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술집 에어간판 뒤, 사람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야트막한 건물 장식에 기대어 있던 그의 옆에는 앳된 얼굴의 여성이 함께 있었다. 한국의 어떤 고등학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세일러복을 입고 있던 여성에게 남성은 몸을 붙여 앉아 술주정을 늘어놓는 듯 보였다. 안전한 공간에서 느꼈던 여운을 간직할 새도 없이, 누군가의 공간이 침범당하는 것을 지나쳐야 했다.
더 많은 여성들의 공간을 지키고 싶다. 더 많은 여성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공간도 많아지면 좋겠다. 그 누구도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성폭력을 무겁게 처벌하지 않는 사회가 바뀌기를 바란다. 성매매 여성이 아닌 성구매자가 처벌받는 법이길 원한다. 바라고, 원하고, 또 지키고 싶은 것들을 마음 속에 꾹 눌러담은 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생각해본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자원활동가 기자단 틈의 은결 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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