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맑시즘2010-끝나지 않은 위기, 저항의 사상>에서
“낙태-죄인가, 여성이 선택할 권리인가” 주제강연을 위해
고려대학교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사실 일주일 동안 출근을 했던 사람에게 토요일 오전은 좀 늦잠을 자고 싶은 시간이기도 한데-라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죠.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한적한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맞은 편에 앉은 중년의 남성분이 맑시즘 2010 포럼 프로그램 책자를 넘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캐쥬얼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머리 희끗한 그 분은
귀한 시간을 내서 강연 내용을 듣고 토론하러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청중들이 소중한 시간 내서 참석하신다는 생각을 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되더군요.
어림짐작으로 70여분 정도가 “낙태-죄인가, 여성이 선택할 권리인가” 강연에 참석하신 것 같습니다.
저와 정진희 님이 각각 30분씩 주제강연을 하였습니다.
저는 강연을 통해 낙태권이 생명권과 대립되며,
그 어떤 권리도 생명권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낙태반대론자들의 주장이 갖는 헛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낙태권이 정말 생명권과 대립된다면, 그래서 낙태가 그들이 주장하듯 살인이라면,
예외적으로 살인(낙태)이 인정되는 경우가 있을 수 없으며,
(인공)수정란은 사람과 동등한 무게로 응급구조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극단적인 생명론은 각종 딜레마를 낳을 뿐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은 내놓지 못하는 반면,
생명을 존중하기 위해 하는 활동의 핵심은 낙태를 범죄화(처벌의 대상)하는 것입니다.
생명존중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 정말 낙태죄 처벌일까요?
모든 사람이 편견에 시달리지 않고, 그 어떤 권리침해 없이 마음 놓고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수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성노동운동 진영에서는 경제위기 이후 임신/출산 해고 상담이 급증하였다는 사실을 누차 얘기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일터를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게 산전산후 휴가는 그저 그림의 떡이죠.
비혼모, 10대모들이 겪는 사회적 편견고 비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제강연이 끝나고 청중들의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청중들은 대부분 낙태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낙태권 보장이 곧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인 양 비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느끼는 부담감이 참 크다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발언자 중에는 자신의 출산, 양육, 낙태 경험을 말씀해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5년 전 첫아이를 출산하였다는 분은, 아무런 사회적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오롯이 본인과 남편이 그 양육을 책임져야 했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5년동안 집과 직장만을 왔다갔다 하면서(맑시즘2010포럼도 5년만에 처음 오셨다고 하시더군요),
직장에서 남의 눈을 피해 유축기로 젖을 짜면서,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전전하면서,
내 아이를 맡겨놓고도 늘 마음이 불안해야했던 고통에 대해서-
사회제도가 이렇듯 형편없는 상황에 처한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더 안전한 환경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때까지 출산을 유보’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먼저 낳은 아이를 포함한 가족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시간을 조절’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낙태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용기있게 출산을 선택하고 싶지만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 무대책’에 아무런 방안을 세울 수 없어 불가피하게 낙태를 하기도 합니다.
진정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이렇게 무책임하게 양육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 불완전한 사회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이 숱한 고민 끝에 내리는 책임있는 결론 중에
‘낙태’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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