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에 맞선 20년 - 아동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바꾼 1991년 사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성폭력에 맞선 2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본 기사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 '9살 나' 강간한 이웃, 20년 뒤 복수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4월 8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1991년 1월 30일. 한 여성의 살인 사건이 국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아홉 살이던 1971년. 물을 길러 나갔던 그는 "잠깐 방에 들어와서 심부름을 해달라"는 동네 아저씨를 따라갔다가 강간 피해를 입었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걷기 힘든 통증이 계속되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스무 살 무렵 중매 결혼을 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의 후유증으로 원만한 결혼생활을 해나갈 수 없어 몇 달 후 이혼을 했다. 아홉 살의 기억과 20여년의 침묵은 성폭력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두 번째 결혼 이후 그는 아이를 낳고 안정된 일상을 되찾은 듯했지만, 때때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과거를 벗어나 살기 힘들었다. 가해자를 찾아가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진 못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던 그는 사건 이후 20여년이 흐른 어느 날, 다시 가해자를 대면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성폭행 보복살인'으로 알려진 이 소식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지는 사연에 그를 지원하는 모임이 꾸려졌고, 언론 보도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 사건은 치유되지 못한 성폭력의 고통을 알려냈을 뿐만 아니라 아동성폭력 문제를 가시화시켰다. 또한 성폭력 특별법 제정의 물꼬를 트는 등 현재도 반성폭력 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다.

 

21년 동안 침묵했던 성폭력, 끔찍한 선택을 낳다

 

  
▲ 김씨 구명 대책위 모습 1991년 당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를 비롯한 사건 대책위 회의 모습.
ⓒ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아무개씨의 재판과 함께 사건발생 지역을 중심으로 '성폭력피해자 김OO사건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사건 대책위가 강조했던 것은 성폭력 피해자가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던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였다.

사건 당사자인 김씨는 엄한 아버지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기에 가족들에게 성폭력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70년대 당시 견고했던 가부장제, 성폭력에 대한 인식 부재, 성차별과 폐쇄적인 성문화, 가족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었던 가난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침묵'하게 했다. 여성들의 성폭력은 폭력이 아닌 '성경험'으로 인식되고, '순결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신문기사와 관련 기록들을 통해 보면 김씨는 사건을 맡은 판사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거나 재판정 입정을 거부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판사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김씨가 할 수 있는 가부장 사회에 대한 명백한 거부 의사이자, 가장 큰 저항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1심 3차 공판의 최후 변론,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는 말은, 당시 재판을 참관한 사람들과 언론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대책위는 재판을 모니터하고 법원에 탄원서를 내며 그의 치료감호 과정을 지켜보았다. 1991년 8월 30일, 김씨에게 살인 혐의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과 치료감호처분 3년이 선고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살인죄에는 이례적인 '무죄'에 가까운 판결이었지만, 김씨를 지원한 단체들은 그의 최종적인 무죄판결을 위해 무료변호인단과 함께 거듭 항소를 지원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 말만 할 수 있었어도..."

 

  
▲ 성폭력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 간담회 사건 이후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사건이 전해지면서 그는 물론 그의 가족들에게도 온정의 손길이 뻗어나갔다. 그의 생활을 지원할 범국민적 후원운동도 전개되었다. 전주의 한 병원은 김씨의 석방 후 그를 무료로 치료받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1990년대 초반의 분위기는 김씨의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게 된 국민들의 힘이기도 했다.

당시 김씨가 치료감호를 마치고 석방될 때까지 후원회를 통해 모은 모금액은 3천만 원 가까이 되었고, 이는 그의 주거비와 치료비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처럼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시민들의 연대와 지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결은 성폭력 특별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의 대책위와 대구여성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가 주축이 되어 성폭력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성폭력을 눈감아주는 사회에 드디어 성폭력 특별법 제정의 물꼬가 트이게 된 것이다.

당시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때까지 성폭력 관련법은 형법, 폭력에 관한 가중 처벌법, 정조에 관한 법률, 윤락행위방지등에 관한 법률로 흩어져 있었으며 가해 남성에게 훨씬 유리하게 운용되고 있었다(한겨레 1991.08.18).

이 사건은 성폭력의 기억을 치유하지 못한 여성들의 트라우마를 알려낸 것뿐만 아니라 은폐되고 있는 아동성폭력의 실상을 드러내었다. 그가 성폭력으로 경험한 아동청소년기의 고통은 성인기까지 이어졌다. 만약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는 문화였다면, 그래서 김씨가 성폭력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21년간의 고통과,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일을 부모님께 얘기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해요. 내가 겪은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여성신문 1993.05.14)

 치료감호를 마친 후 인터뷰를 통해 밝힌 그의 속마음이다. 이것은 법정에서 그가 보였던 두려움 이전에, 피해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담긴 표현이었다. 치료감호 종료 후 그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남편과 아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사건은 아동성폭력을 비롯한 성폭력 실태에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제1회 세계성폭력추방의날이었던 1991년 11월 23일, '어린이 성폭행 추방을 위한 한마당'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4월 개소 이후 접수된 어린이 성폭력 실태와 사례분석 등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서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1991년 4월에서 9월까지 접수된 상담 418건 가운데 어린이 성폭력은 123건으로 전체의 29.4%를 차지했다. 이 중 97.6%의 피해자가 여아였으며, 전체 어린이 성폭력 중 37건이 '근친성폭력'이었다. 아동성폭력과 근친성폭력의 실상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성폭력 가해자가 우리 사회의 평범한 이웃이라는 상담소의 발표에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김씨의 20여년의 삶이 더욱 가슴 아프게 와 닿는 순간이었다.

 

사건 이후 아동성폭력 대책, 무엇이 남았나

 

 

  
2009년 10월 10일 시청 광장에서 열린 아동성폭력범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촛불집회 모습
ⓒ 한국성폭력상담소

 

지난 2010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피해자 중 아동과 유아는 13.6%, 청소년은 20.1%를 차지하고 있어 전체 성폭력 피해자의 33.7%가 미성년자로 나타났다. 이러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 중 일정 부분은 아직도 사건 발생 후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 지난 후 상담해 오는 사례들이다.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누구의 돌봄도 받을 수 없었기에 침묵했던 김씨의 사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6년 발생한 용산 초등학생 성폭력 살해사건, 2007년 안양 일대에서 발생한 두 초등학생의 성폭력 살해사건, 2008년 발생한 안산 초등학생 강간 상해사건, 2010년 서울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강간 상해사건과 부산에서 발생한 중학생 살해사건까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사회는 아동성폭력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아동성폭력 공소시효를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로 정지하고, 가해자 전자발찌착용과 화학적 거세, 신상공개 등 강력한 처벌을 약속하는 정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 처벌 방식 혹은 감시에만 집중되어 있어 성폭력 예방의 실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성폭력 사건의 법적절차에서 겪는 피해자들의 어려움도 여전하다. 아직도 친고죄인 성폭력 사건의 고소율은 10%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이 중 기소율은 절반 이하다. 2008년 안산 초등학생 강간 상해사건처럼 고소 후 수사기관의 2차 피해를 받는 경우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렇게 기소가 되어 유죄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집행유예에 그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따라서 김씨의 사건 이후 지속적으로 문제제기 되어온 성폭력 사건의 엄중한 처벌과 한국사회 성문화의 변화는 성폭력 특별법이 발효된 지 17년이 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출처 :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 '9살 나' 강간한 이웃, 20년 뒤 복수한 이유 - 오마이뉴스

Posted by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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