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 빌미로 시민사회단체 죽이기에 나선 행정안전부 | ||||
지난 2월 행정안전부(행안부)는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 근거한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대상에서 불법·폭력시위 참가단체를 제외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례적인 지침을 발표했다. 지침 발표에 이어 행안부 지원사업 신청이 마감되던 3월 초에는 경찰청이 촛불집회 참가를 이유로 '불법 폭력시위 단체'로 규정한 1800여 개 시민단체 가운데 일부가 지원금을 신청하였다는 소식이 특별한 뉴스라도 되는 양 여러 보도매체에 실렸다. 행안부 발표 직후, 여러 시민단체들은 목소리를 모아 자발적이고 다양한 공익활동을 지원한다는 비영리민간단체지원사업의 기본 정신에서 벗어난 지침을 '시민단체 길들이기', '친정부단체에 대한 편향적 지원'이라고 비판하면서 행안부 사업에 공모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행안부 지침의 영향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행안부의 벽을 넘어 다른 부처에서 발주하는 다양한 시민단체 지원사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고용평등상담실을 운영해온 시민단체들은 느닷없이 '불법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받았다. 확인서에서 요구하는 내용이 보조금 지원의 근거가 되는,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지원 목적, 즉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의 양립을 지원함으로써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정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시민단체 길들이기
여성발전기본법에 근거하여 집행되는 여성부 공동협력사업은 선정 절차를 모두 마치고 나서, 선정된 단체 중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몇몇 단체를 대상으로 노동부와 유사한 확인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채, 선정 결과 발표가 난 지 1개월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지원금을 교부하지 않고 있다. 확인서를 제출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지원금 교부를 거부하거나 유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이렇게 교부가 지연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행안부가 비영리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선정 결과 발표를 몇 차례나 연기하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데, 혹시 여성부도 행안부 발표만을 기다리면서 눈치 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자체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경우 서울시 여성발전기금 지원사업에서 탈락하여 그 사유를 문의하니, 행안부의 비영리민간단체지원 관련 지침을 검토·적용하여 결정하였다는 답변을 들었다. 다른 지자체에서는 아예 지원사업 공모안내문에 행안부의 지침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공시하여, 원천적으로 공모 대상을 제한하기도 했다. 시민단체가 개최하는 '기자회견'을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단속하는 행태도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불법·폭력시위 참가단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의사표현 행위를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싶다.
'불법' 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까닭
부처나 지자체를 막론하고 마구잡이로 적용되고 있는 이 지침은 보조금을 가지고 시민단체를 길들이고 통제하려는 전략임이 자명하다. 다만 정부 코드에 맞는 방식의 단체 길들이기가 지금 무엇을 통제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꼼꼼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촛불시위가 '불법' 행위인지에 대한 토론은 일단 논외로 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불법행위를 일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불법집회를 주도하거나 참가하는 단체에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보조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 주장에는 단순히 촛불시위를 했느냐 안 했느냐를 넘어 준법정신을 소중히 여기고 합리적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는 보다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준법과 불법의 이분법적 기준으로 공익활동의 공공성을 모두 판단할 수 있을까?
시민단체가 지원금으로 실행한 사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 상담소가 문제의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으로 수행한 사업 중에는, 여성들이 시공간을 막론하고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밤길되찾기캠페인 '달빛시위'가 있다. 달빛시위는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경고가 여성의 일상적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적 메시지이며 성폭력 근절에 하등 기여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믿는 합리성이나 상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데에 사업의 주요 목적이 있다.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법운용의 문제점을 밝히는 '성폭력을 조장하는 대법원판례바꾸기 운동'은 객관적이고 공평하다고 믿는 법이 갖고 있는 편견과 그 편견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를 낱낱이 고발한 사업이다. 법조인들부터 호평을 받았던 이 사업 또한 두 해 전에 서울시 여성발전기금으로 실행한 것이다. 명문화된 법을 준수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 우리가 상식이라는 합의하는 것,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시민단체가 펼치고 있는 '공익활동'의 핵심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다시보기의 필요성과 방법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시민단체 활동의 '공익성'은 불법과 준법이라는 사후 판단을 넘어, 상식이나 규칙 더 나아가서 법률까지도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정부가 지원금을 출연하는 것은 단순히 '시민단체 활동에 필요한 돈을 제공한다'는 역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시민이나 기업의 기부문화가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데다, 그나마 기부가 이루어지는 분야 또한 어린이 후원 등에 편향되어 있다. 이런 척박한 조건에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사회운동을 실천하는 NGO단체가 성장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부 지출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부의 지출은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공존과 상생의 길을 도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정권의 성향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잣대가 아니라, 보다 철저한 토론과 합의를 통해 마련된 원칙과 철학에 따라 정부 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정부 감시 및 대안 제언활동을 하는 단체가 조직되고 성장하는 동력은 각 사회마다 각기 다를 것이다. 정부, 기업, 개인 등 어느 분야에서의 지출이든, 사회적 공공성을 위한 합리적인 지출을 도모할 수 있는 원칙, 문화,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정권의 입맛이나 기업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착한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낸 세금이 불법시위 참가 단체의 활동에 쓰이고 있다는 앞뒤 맥락 없는 언론들의 선정적 카피에 좌지우지되기 보다는, 우리의 세금, 우리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더 나아가서 사회적 지출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이 진지하게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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