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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에 대해서/[나눔터] 생존자의 목소리

나눔터 85호 <생존자의 목소리①> 내가 나로 살아가는 동안에 - 캐시

내가 나로 살아가는 동안에

 

캐시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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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여성신문에도 전재되었습니다. ☞ [여성신문에서 보기]

 

저는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일들을 말하기에 더없이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힘들어하기도 했고 울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일어났던 폭력 피해 경험은 잊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지나간 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그로 인한 후유증,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 등 많은 것들이 저를 괴롭히고 있지만, 저는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서 보기 위해 이 지면을 빌어 하고 싶은 말을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0살에 처음으로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싫은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엄마의 대응은 저를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말하지 않은 저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가해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던 엄마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엄마는 제게 본인이 잘못했냐고 물으시지만, 저는 한 번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맞서 싸울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학교폭력을 경험했고, 그 중에는 동성 간 성폭력도 있었습니다. 탈가정을 결심한 18살, 학교와 집 밖을 나서며 저는 도망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도 저는 다시 성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회사를 그만두고 도망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런 환경에 내몰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였습니다. 살고 싶어서 어딘가로 도망쳐가기를 반복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저를 가장 크게 괴롭혔던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후유증으로 생긴 자살사고를 동반한 양극성 장애였습니다. 생계도 물론 중요했지만, 사회 생활조차 할 수 없이 내리누르는 무력감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또 어딘가로 훌쩍 떠났습니다. 어디든 좋으니,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진 것을 모두 내버려두고 달리기를 반복했습니다. 피해자라는 말을 듣고싶지도 않았고, 내 잘못이라는 죄책감도 있었습니다.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한 병은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났습니다. 신체적으로 증상이 나타나 가슴에 통증까지 느끼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응급실에서 진정제를 처방받았고, 병원을 다시 찾아가 약을 받아왔습니다. 약을 먹으면 나아진다니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호전되는 자신을 보며, 조금씩 일상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약을 먹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고, 엄마는 이번에도 약을 먹는 저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의사와 상의도 없이 약을 먹기를 중단해 본 적도 있지만, 옳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상담을 받으며 약물 치료를 병행하자 몸도 마음도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저는 16년만에 모든 일이 나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알았고, 우울감도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것을 강요받으며 지내왔습니다.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생존자로 스스로를 다독인 후에도, 저는 다시 한 번 성폭력 경험을 해야 했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야 했습니다. 끝까지 고소를 결심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돈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생계는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가 나로 이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안아주고 다독일 시간을 갖는 것.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제가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다시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에게는 스스로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존중하며 내가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잘 살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 못했던 공부, 하지 못했던 일들. 내가 나를 만들어나가고 가꿔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괴로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릴 때가 많지만,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언제쯤이면 나아질까 괴로워하던 자신에서 내가 나 자신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일상을 찾아나가기 위해서요. 16년만에 첫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지지와 도움을 준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에게 말로 다 하지 못할 감사를 전합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친구에게 얻은 조언을 쓰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__ 힘들고 외로울 때 마다, 학교 가는 길에 보았던 해안터 앞 등대 ⓒ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