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회복 프로젝트 후기]
‘나’에게 여행을 선물했어요
제쥬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책자 형태인 [나눔터]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분은 [회원가입]을 클릭해주세요. |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경험 이후 일상을 다시 살아가고 삶을 기획하는 데에는 다양한 욕망이 작용하지만, 현재 국가 차원의 지원 제도는 의료적, 심리적, 법적 분야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일상회복프로젝트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피해생존자가 스스로 지원금의 규모와 지출 계획을 기획하고 실천하며 삶의 안정성과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2019년 일상회복 프로젝트 참가자 ‘제쥬’님의 후기를 전합니다.
기획 초기에 저는 안 좋은 기억에 많이 묻혀 지내던 시기였습니다. 우연히 소개로 알게 된 이번 프로젝트를 신청하면서 감사했지만 무엇을 해야 기분이 나아질지는 하나도 알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시작 후 지원금을 받고도 두어달 동안 비슷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5월 중순이 될 즈음 간절하게 제주도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4년 만에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일상회복 프로젝트를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저는 여행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여행지였던 5월의 제주도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을 꾸짖지 않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따뜻하게 받아줬습니다. 이렇게 집을 떠나 본 것이 4년만입니다. 그동안은 일 문제, 돈 문제, 날씨 문제, 계절의 영향으로 발이 묶였으나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원할 때는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용기를 얻어갑니다.
서울에 있을 때 신경 쓰이던 사람 관계, 그 속에서의 내 모습, 하고 있는 일의 진척도, 성과 등이 잠시 다른 세계의 일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에 있으면서는 ‘잘못’이라든가 ‘나쁜’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현재의 저만이 남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햇빛이 내리쬐는 바다에 앉아 손으로 물장구를 친 순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평온하게 물을 만지고 돌을 골라낸 건 15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날만큼은 온전하게 저로 존재했고, 제가 좋아하는 모습이 되어 편안하게 쉬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지요. 이 세상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적인 행위에 중독되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고 뻔뻔하게 사는 그 사람도, 그를 둘러싼 환경도 아니라 바로 저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의 행복이 저에게 있어서는 그들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를 최우선으로 아끼고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풍경을 저에게 더욱 자주 보여줘야겠다고 말입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일상을 굳건하게 다지고자 하는 힘이 마음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그동안 멈췄던 길을 다시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저는 느꼈습니다. 제자리에서 용을 쓰고 버티다 몸이 녹아내리기 전에 어디론가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다시 되돌아올 힘이 생길테니까요. 하지만 스스로를 아끼려면 어쩔 수 없이 비용이 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일상회복 프로젝트를 통하여 그 부분을 지원받게 되어 어려움 없이 여행을 떠날 수 있었고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일상회복 프로젝트를 알게 되고 같이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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