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가영
가영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책자 형태인 [나눔터]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분은 [회원가입]을 클릭해주세요. |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말하기 참가자였던 가영님은 현재 대학원에서 예술심리치료를 전공하며 2019년 성폭력 피해자 치유회복프로그램 ‘내 안의 나 만나기’ 보조진행자로 상담소와 함께해주고 계십니다. 생존자로서, 다른 생존자의 치유를 조력하는 과정에 있는 가영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영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대학원 종강 시즌에 맞춰 무척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가끔 넋을 놓기도 하는 중인데요, 일상을 잘 꾸려서 한 절기를 마무리 해야 하기 때문에 심경이 복잡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되어 돌아올 때 저 역시 치유라는 작업은 평생을 가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여성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다시 회복시켜준 연대의 공간이기도 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저도 언젠가는 제가 받았던 연대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한번 쯤 찾아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살아 왔어요. 또 언젠가는 좀 더 완성된(?) 모습의 상담사로서 여성들과 만남의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 어찌어찌 저에게 그 벅찬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감사하게도 주어져, 현재 진행되는 2019 성폭력 피해자 치유회복프로그램 ‘내 안의 나 만나기’의 보조진행자로 생존자들과 함께 하고 있답니다.
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당시에는 무척 호기롭게 글을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즐겁고 화기애애한 시작과 마무리가 될 줄 알았건만, ‘생존’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무게는 생각보다 저를 넋 놓게 하기도 하고, 아프게 하기도 하더라구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기의 타자를 이리저리 눌러보려 했지만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했어요. 나는 치유가 잘 이루어진 회복자이고, 여성들을 지원할 수 있는 치유자로서 잘 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렇게 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괜히 이 작업을 시작한 건 아닐까? 내가 ‘생존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걸까? 두려움이 일었어요.
다만 지금의 ‘가영’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모든 것이 그냥 ‘나’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리고 솔직하자고요. 그렇게 다시 자리에 앉아 침착하고 솔직하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해요.
사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혹은 나로부터) 절망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에도, 나의 생존의 무게를 견디면서 타인을 돌봤던 또 다른 치유자였을 것이고 그건 여성 연대의 모습이었을 거에요. 아니 그랬던 거죠. 그래서 생존자들이 자신의 생존의 무게를 감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 스스로를 감히 ‘치유자’라고 쉽게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이 여정에 함께한 시작한 이후로 ‘제가 무언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짜잔~!!’같은 건 없었어요. 주 진행자 선생님과 상담소 담당자님의 헌신하는 모습에 감탄하고, 무엇보다 생존자들 스스로가 서로에게 또 다른 치유자가 되어주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행복이 또 한 스푼 얹어져 저에게도 생존의 연대가 되더라고요.
그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자가 되어주는 것을 지켜보며 ‘이제 이곳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앗! 하지만 단언컨대, ‘조금 떨어진 곳에 있기’까지의 과정 역시 쉽지는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성폭력과 관련된 피해 경험뿐만 아니라, 여성 가해자를 가해자로 인정하는 시간 동안 여성으로 인해 무너졌던 제 경험이 다시 여성들의 연대로 회복되는 과정을 지나오면서 이게 ‘우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성에게 입었던 영혼의 상처를 무엇보다 여성들의 연대로 회복했다는 지점이 저의 삶에서는 가장 크게 와 닿고 감사한 부분이에요. 부족한 저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함께 하는 사건지원부터, 저를 치유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활동가 선생님과 상담 선생님께 무척 무척 감사한 마음이에요. 이번에는 ‘지원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지원과 지지를 하는’ 위치에서 치유자로서 저 역시 용기 있게 한 걸음 밟아보는 시도를 해 볼게요!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요. 당신들의 생존이 또 다른 생존자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거기에는 치유자로서 한 걸음을 떼는 저 역시 포함되어 있고요. 언제까지나 이 연대는 제가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의 ‘부추김’이 될 거에요.
모두 나대고 부추겨요.
오늘도 일상 안에서 ‘하루’를 살고, 이것저것 치열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당신들에게.
사랑해. 그리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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