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번 모임에 이어 이번달에도 후기를 작성하게 된 닻별입니다.
7월 모임이 한달 쉬어가게 되는 바람에 8월 모임의 리-다를 맡았는데요, 제가 제안한 영화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1세대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저는 사실 마블 영화를 거의 다 챙겨본 마블 시리즈의 팬입니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캐릭터가 어떤 역사성을 거쳐 솔로무비까지 왔는지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 이번 영화는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이 마블 시리즈를 본 적이 거의 없었던 데다가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던 탓에, 제가 좀 많이 떠들긴 했지만요.
방구석 1열에서 마블 시리즈의 등장인물을 설명했을 때, 나타샤 로마노프를 '조율하고 경청하는 역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타샤는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거의 대부분 수행한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너무 납작하게만 읽는 것 같아 걱정되지만.. 나타샤의 첫 등장은 <아이언맨 2>입니다. 섹시한 비서인데 사실은 스파이라는 설정으로 처음 등장한 나타샤는 시리즈가 점점 진행될수록 '섹시한 이미지'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 '어벤져스'라는 남초집단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도맡습니다. 갈등중재자로서의 역할은 특히 <시빌 워>에서 정점을 찍죠. 어떤 멤버는 '전형적인 남초집단의 여성 느낌이다'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때로는 섹시해야 하고, 때로는 현명해야 하는 이분법 안에서 사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2019년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는 클린트 바튼(호크아이) 대신 죽음을 맞이합니다. 엔드게임에서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는 지금까지 시리즈를 이끌어온 다른 남성 캐릭터들의 영웅적 퇴장과는 다르게 아주 초라한 죽음을 맞습니다. 어느 한 쪽이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니, 전형적인 남성중심적 영웅신화의 클리셰라 분통을 터트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미 이 캐릭터의 끝을 마블 시리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기 때문인지, <블랙 위도우>는 엔드게임보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영화평론 기사에서 '나타샤 로마노프를 떠나보내는 헌정영화'라고 평한 바 있는데, 몹시 공감되었어요.
앞서 말한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감상한 다른 멤버는 나타샤가 '자기표현을 잘 안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옐레나는 나타샤의 슈퍼히어로 랜딩 자세를 "폼잡는다"며 비웃곤 하는데, 나타샤는 어린 시절 임무를 위해 묶였던 가족이 재회한 장면에서도 표정에 동요가 그리 크게 드러나지 않죠. 물론 상처받은 마음을 드러내기는 합니다만, 충격받았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버린 옐레나보다는 훨씬 감정의 진폭이 작긴 합니다. 나타샤 로마노프, 블랙 위도우가 너무 성공한 영웅이어서일까요? 연예인으로서의 숙명과 비슷한 것인지 조심스레 추측하면서, 공적 자아로 똘똘 뭉친 히어로 장녀라는 평을 남겼습니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이야기했을 때, 많은 멤버가 꼽은 장면은 옐레나의 조끼 비하인드 스토리가 등장하는 씬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내 선호대로 산 조끼가 주머니가 많아 좋다며 자랑하는 옐레나는 욕망에 솔직합니다. 억눌렸던 자아가 이제서야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인지, '나는 개 키우고 싶어.' 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엔딩 씬에서 개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 캐릭터가 기대되면서도, 나타샤가 상대적으로 대비되어 짠하게 느껴진다는 평도 있었어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감정에 솔직한 옐레나와 달리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드레이코프의 딸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달립니다. 나타샤는 헌신적으로 레드룸의 생존한 동료들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죄와 직면합니다. 2대 블랙위도우인 옐레나와의 자연스러온 바톤터치를 위해서일까요? 이 영화마저 온전히 나타샤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마블 영화가 다루지 않았던 여성 캐릭터들의 연대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남성 캐릭터는 1) 무능한 가부장이거나 2) 악역으로만 존재하고, 여성 캐릭터들이 때로는 갈등하고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전개가 그간 마블 스튜디오가 해오지 않았던 이야기 전개 방식이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혈연으로 이어져있지도 않고 임무를 위해 급조된 가족이었지만, 서로 다른 네 사람이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대안가족의 형성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제게 마블 시리즈는 미국식 가부장-가족주의를 수호하는 영화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블랙 위도우>에서는 전통적인 가족 구성원(아버지-어머니-자녀) 으로 보이더라도 혈연이 아닌 관계의 사람들이 가족으로서 관계맺는 방식에 대해 그렸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의 발전이 조금이나마 느껴졌습니다.
레드룸 장면에서도, 죄책감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안고 '위도우'로 길러진 여성들을 끝내 구해내고, 자신의 치부이자 죄책감의 원천이었던 드레이코프의 딸을 끝끝내 살리려 애쓰는 것, 이후에 그들이 보이는 연대감에서도 여성연대를 느낄 수 있어 신선했습니다. 여러모로 마블 사에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들이었어요. 나타샤 로마노프가 내민 연대의 씨앗이 후속 시리즈에서 어떻게 발아할지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함께 모인 멤버들의 한줄 후기와 함께, 8월 내가반한언니 모임 후기 마무리하겠습니다. 9월 모임 후기로 만나요!
신아: 역시 이야기를 나누니 영화가 풍성하게 와닿는다. 블랙위도우가 너무 안쓰럽고, 세상 모든 블랙위도우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지은: 다음 개봉때는 빅사이즈의 마블을 기대한다.
닻별: 이제 블랙위도우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열쭝: (영화 안 봐서 그렇지만...) #우리모두블랙위도우다
윤정: 세상을 구하는게 이렇게 처연하다니.. 다음엔 통쾌하게 세상을 구해주길 바란다. 나도 세상을 구하겠다.
<이 후기는 성문화운동팀 닻별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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