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미지와 ‘부모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지는 5월 한가운데,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 공폐단단 활동가들이 둘러앉았습니다.
202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피해 상담 중 9.5%가 친족성폭력 피해 상담이었고, 친족성폭력 상담 전체 건수 중 공소시효가 도과된 건은 57.9%였습니다.
‘친족성폭력을 말하고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는 단단한 사람들의 모임’ 공폐단단, 상담소와 같이 여러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운동과 요구를 입법부에서도 일부받아 안아 21대 국회에서는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관련 법안이 3개 발의된 상황입니다. 이에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하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고민은 무엇인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공소시효 폐지를 더욱 넓은 관점에서 논의해 보는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친족성폭력 의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하는 열띤 토론의 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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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공폐단단의 활동과 역사가 더 알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따라 가보셔요~ https://ksvrc.tistory.com/1291
다른 일상, 우리가 직접!
한국성폭력상담소 동은 : 공폐단단 지금까지 수많은 활동을 해왔다. 매마토가 20회 이상 정기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파생된 소모임과 개인 활동들도 활발하다. 공폐단단 활동가들에게 지난 활동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어떻게 다른 일상을 만들어왔는지 듣고 싶다.
공폐단단 영서 : 지금 자료를 읽으면서 복기해 보니 저 같은 경우는 맨땅에 헤딩하면서 살았다. 너무 기쁜 건 지금은 같이할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2001년에 대학원 졸업논문에서 친족성폭력생존자들에게 사회적 지원방안이 마련됐으면 해서 필요한 정책들을 의식주부터 써 내려갔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도입된 것들이 많다. 변방의 작은 목소리였을 텐데 되는구나 싶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배제도 될까? 법률가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따지지만 저한테는 10대도, 20대도, 30대도 없었다. 매일 생존해왔는데 어느 순간 “너 이제 40대야 나잇값 해야지” 이렇게 사회가 요구하는 상황이다. 법적 논리로 형평성을 얘기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안 들여다보나? 아직도 우리의 목소리가 설득이 안 되나 마음이 아팠다. 근래에는 ‘친족성폭력 이해와 지원’을 주제로 강의를 자주 하는데 얼마 전에 어떤 분이 강의 평가에 비아냥거리듯이 “성공한 사람의 간증같이 들렸어요”라고 남겨놨더라. 나중에 들어보니 친족성폭력 피해자 중 한사람이었고 다른 강의평가에도 비슷하게 쓰신다고 하지만 어떨 때는 이렇게 진정을 다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들리는지 모를 때가 있고 마음이 복잡하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가시적으로 모여 있는 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교육 때 가끔 공폐단단 인터뷰 영상을 틀어주는데 교육 듣는 분들이 친족성폭력생존자를 이렇게 많이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또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공폐단단 민지 : 저 같은 경우는 공폐단단 처음 만들어졌을 때 되게 힘들었다. 거의 말이 없었다. 당시에 경향신문에서 친족성폭력 관련 영상을 찍었는데, 그때도 말이 안 나와서 영서님이 리드해 줬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성폭력생존자 자조모임 ‘작은 말하기’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때 내 피해에 대해서 다른 생존자분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으면서 말이 트였다. 공폐단단하면서는 내 피해에 대해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 이후 삶에 대한 말하기가 시작됐다. 피해 이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누구와 연대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지 말하게 된다. 공폐단단 처음 시작할 때는 ‘힘들어죽겠는데 사회를 어떻게 바꿔’ 그랬는데, 갈수록 다른 생존자들이 활동하는 것도 보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아 이렇게 저렇게 활동할 수 있구나’ 배우고, 피해 이후의 삶에 대해 한발 한발 밟으면서 말 그대로 활동을 하게 된 것 같다. 공폐단단은 제 피해를 디디고 운동을 하게 해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폐단단 지안 : 저는 오랫동안 피해자 정체성을 잊고 있었고, 그냥 숨기고 있었는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집단 상담을 통해서 처음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그때 ‘나의 피해도 인정받아야 하는구나’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민지님 통해서 매마토를 알게 되었고 그때는 그냥 별생각 없었던 것 같은데, 한 달에 한 번, 30분을 함께 활동했던 게 쌓이면서 점점 나도 잘 모르겠는 어떤 힘으로 작동했다. 다른 생존자들을 보면서 같이 역동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전에는 “어떤 역할 할래?” 하면 ‘내가 해도 되나? 내가 하면 망할텐데’ 하면서 뒷걸음질 쳤는데 그렇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결심하게 됐다. 이분들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니까 이분들과 같이 있으면 나도 멋져질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축제 기획도 같이 하고 사회도 보게 되고 계속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뭘 하고 싶은가도 찾게 되고, 자연스러운 성장이 이루어졌다. 일상의 불편도 많이 사라지고 얼마전에 심리검사 받았는데 불안이 0이 나왔다. MBTI도 INFP에서 ENFP로 바뀌었다. 그 과정이 긴장되고 떨리지 않았고 한 단계 한 단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돌아보면 ‘내가 어느 순간 이렇게 되었지?’ 하는데 앞으로 큰일 날 것 같다(웃음)
한국성폭력상담소 오매 : 활동하느라 바빠서 불안을 느낄새도 없는 것 아니냐. 영업 외길 중~
공폐단단 심이경 : 저는 며칠 전에 독일에 계신 기자님과 인터뷰했는데 그분이 공소시효 폐지되어도 당장 당신에게 소급 적용 되는 거 아닌데 이 활동 왜 하냐 이렇게 물어보시더라. 그래서 나도 생각해 봤는데 이타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다. 이 활동이 나를 고립감에서 뭔가 동지가 있다는 연대감으로 바꿔주고, 활동을 하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용기를 내봐야지, 나도 저 사람처럼 긍정적으로 해봐야지’ 그런 좋은 자극들을 계속 받는다. 그래서 내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활동하면 영서님처럼 많은 사람 앞에 서게 될 일이 많아질 텐데 마이크가 나한테 왔을 때 설득력 있게 잘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겠다’ 이런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지안 : 저는 지금 발성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 성명서 낭독해야 하는데 지금 목소리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일동 웅성웅성)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아 : 활동가로서 우리는,,, 왜 계속 I인가,,, 마이크는 최대한 옆 사람한테 넘기고 싶기도 한데,,,
동은 : 입법운동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나누기 전에 공폐단단 올해 활동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 여성재단 공모를 통해 ‘생존자랑댄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다큐도 기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지안 : 작년 10월 지원 사업 공모가 있었고, 저희 안에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서 차세대 여성운동 분야에 지원하여 최종 선정되었다. 생존자랑댄스라는 춤테라피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유는 언어를 통해 치유를 할 수도 있지만 친족성폭력이라는 것이 언어를 갖기 힘든 피해이지 않나. 그래서 몸의 언어를 찾는 것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 아닐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공폐단단 한사람 한사람의 의견이 모였고, 영서님이 강사님을 소개해 주셨고, 하윤님이 ‘사장님’ 역할을 맡아서 굵직굵직한 것부터 디테일까지 챙겨주고 계신다. 지금 2회기인데 저희가 장소나 프로그램은 준비했지만 너무나 힘 있고 역동적인 분들이 오셔서 잘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을 기록하고 싶은데 다큐 형태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누던 중 이전에 다큐 작업 경험이 있는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상의를 드렸다.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이전에 작업했던 감독님과 연결해 주셨다. 지금은 감독님과 미팅을 진행하고 참여자들 동의를 받고 있는 단계이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씬 구성 끝났고, 다큐 한 편 다 찍었다(웃음)
약한 데를 드러내고, 서로 연결되자
동은 : 연대활동 활발하게 참여하고 계신데 어떤 계기로 어떤 고민을 통해 연결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지안 :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다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제 소수자성을 받아들이고 보았을 때 약점이라고 할 부분을 드러내는데 이상하게 연대의 힘이 모이면서 제가 점점 강해지고 사람들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성소수자 운동은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외와 배제를 겪어본 이들은 성소수자 운동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연락했고, 그 공간에서 기독교 내 반성폭력 운동하시는 수녀님, 신부님, 목사님도 만나게 되었다. 없던 신앙심도 생기게 하는 만남을 통해 예배 참여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변희수 하사 추모제,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전장연 투쟁현장 모두 차별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연결되었고 그래서 참여하게 됐다. 이후에도 인권운동과 동물권 운동과도 연결되는 등 접점을 넓히고 있다.
민지 : 예전에 공폐단단 활동하시는 푸른나비님이 왜 사람들이 친족성폭력에는 관심을 안가질까? 질문했던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뉴스를 볼 때 눈을 질끈 감고 싶거나 회피하고 싶은 뉴스가 있더라. 보기 싫고 힘이 드니까. 그런데 우리의 운동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게 중요하듯이 다른 운동도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다른 소수자운동과 연결되고 연대하는 것 같다. 지안님이 특히 그걸 엄청 잘 해주고 계시다.
연령이 아니라 관계를, 보호가 아니라 권리를
동은: 현재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살펴보고 입법운동에 대한 상황을 진단해 보자.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요구하는 안이 무엇인지 이해를 맞추고, 공소시효 폐지를 주장하는 논거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서 : 저는 법을 잘 모르니까 법을 잘 아는 전문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아동이나 장애인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와 묶이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사건 중심으로 입법이 되었던 흐름이 있으니까. 친족성폭력만 따로 떼어서 입법이 되는 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우리가 시위하는 건 아무 실효가 없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법안 발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공소시효 정지 기간을 조율하거나 공소시효 연장에 대해서 합의해 나가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독일의 경우 친족성폭력피해생존자는 30세까지 공소시효가 정지되는데 이런 사례를 참고해서 공소시효 폐지가 아니라면 공소시효 연장이나 정지 기간을 현장이랑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 저는 매마토 시위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법안들이 발의되었다고 생각한다. 저도 상담활동가로서 피해자 지원을 할 때는 친족성폭력 공소시효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성문화운동팀에 와서 발의안 찾아보고 여가위 보고서 보니까 입법운동 단위로서 우리 안의 논리나 연구가 뒷받침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있을 간담회와 국회토론회를 우리의 논리와 내용을 잡아가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영서 : 사실은 공소시효 폐지되면 좋겠다 싶은 건 이 관계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 가해자가 죽고 나서 보니까 가족관계증명서에 뭐가 뜨더라. 이 사람이 죽어도 관계가 끝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에 섬뜩하면서 동시에 아직 내 몸에 기억이 살아 있는데 나라가 무슨 기준으로 기한을 정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민지 : 영서님 말에 덧붙이면 범죄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는 공소시효가 있지만 피해에는 기한이 없다. 피해 이후에도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 뇌가 똑똑하기 때문에. 어쨌든 내 기억 안에 있고 내가 치유하고 극복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아프지는 않지만 흉터로 남는다.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그 기간 동안 내가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포함해 어떤 보상을 받은 적도 없다. 피해에는 공소시효가 없는데 가해자에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처벌받지 않도록 시효를 둔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존자들도 욕구가 다 다르다. 사법적 해결을 하고 싶은 사람, 사과를 받고 싶은 사람, 공론화를 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욕구가 변하기도 한다. 피해 회복을 위해 자조모임에서 치유에 먼저 힘쓸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가해자 처벌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저는 공소시효 폐지를 요구하는 이유가 최소한의 선택권이라도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유랑 : 그렇다면 모든 연령에 대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논리를 어떻게 탄탄하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상담소 상담 통계를 봤을 때 친족성폭력 피해자 대부분이 아동청소년인 가운데 성인 시기에 친족성폭력 피해를 입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가족과 떨어져 살다가 성인이 되어서 다시 함께 살게 됐을 때,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관계, 예를 들면 시부에 의해서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다. 이렇게 성인시기 친족성폭력의 발생 맥락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서 : 저는 그루밍 성폭력도 아동청소년에 한정되어 논의되는데 성인여성의 발생 맥락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친족성폭력도 여성이 가정 안에서 어떤 관계성을 갖냐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성인 여성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
민지 : 저는 법적 논리를 고민할 때 연령보다는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다. 벗어날 수 없는 관계였다든지 권력관계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영서 : 그래서 저는 공소시효 배제 대상을 아동 청소년으로 한정하는 것은 반대한다. 친족성폭력이면 연령 상관없이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피해자를 보호해달라는 게 아니라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라는 거다. 배제 연령을 아동청소년에 한정하는 건 보호주의적 주장으로 읽힐 수 있다.
공소시효 폐지만이 전부일까? 국가와 사회의 역할 상상하기
유랑 : 다른 쟁점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다. 성폭력 피해 해결이 사법적으로만 한정적으로 제시되는 걸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는 다른 해결 방법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공소시효 폐지 이외에도 친족성폭력 피해회복을 위해 국가와 사회에 요구해야 할 과제들도 같이 나눠보면 좋겠다.
민지 : 저는 책도 쓰고, 활동도 하고 있지만 지금도 명예훼손을 감수하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나의 피해에 대해 말하는데 왜 제한이 따르거나 명예훼손죄를 감수해야 하는지 아이러니가 있다.
동은 : 사법적 해결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기반 마련을 요구해 볼 수 있겠다.
스웨덴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 중에 바르나후스 모델이 있는데 ‘아동의 집’이라고 해서 아동이 피해를 입었을 때 빠르게 필요한 것과 연결해 줄 수 있는 통합적 모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원할 때 법적 절차를 선택할 수 있고 지원도 해주면서 동시에 의료적, 정서적 지원을 통해 피해자의 취약해진 상태를 돌보고 지금 당장 공간이 없다면 사회복지시스템과도 연결된다. 제도 자체로는 아동 피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성폭력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제도 같다.
신아 : 바르나후스 제도가 만들어지고 잘 시행될 수 있는 배경에는 한 사회가 성폭력을 마주하는 다른 관점이 있다. 피해자에 대한 신뢰가 기본적으로 있고, 피해자 진술에만 의지하지 않고 수사가 진행되며, 사법처벌이 만능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고 있을 때 성폭력 사건의 재판 모습도 다르다.
영서 : 예전에 공소시효 폐지 이후에 대해서 생각한 거 있어?라고 오매한테 물어본 적 있다. 공소시효 폐지가 되었을 때 ‘나도 해볼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법적 지원이 기본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해자를 고소하면 바로 집을 나와야 한다. 가해자와의 분리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 오히려 공소시효가 폐지된 이후 신고하고 싶어도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고소를 하면 모든 가족관계가 다 끝난다고 봐야 하고 그걸 감내하는 게 가장 큰 과제인데 공소시효가 폐지되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 바르나후스 제도와 유사한 게 한국에서는 해바라기센터인데 연결도 잘 안되고, 대기도 많고, 제도적으로 미비한 부분이 많다.
유랑 : 신고하면 가족관계 다 끝난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가구별 복지체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원이 가족을 통해서 배분된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사실상 혈연관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데 이 체계 자체를 문제제기해 볼 수 있겠다.
영서 :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나를 지지해 주는 관계가 가족밖에 없다. 그래서 그걸 놓고 나오는 것이 무지막지한 일이 된다.
민지 : 그래서 저는 생활동반자법이 반갑고 관심이 간다. 비혼의 삶을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심이경 : 정말 가족이라는 게 징글징글하다. 법적으로 유류분 제도라는 게 있다. 만약 제가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저의 평소 뜻과 상관없이 제 자산의 일부가 가해자에게 간다. 호적을 팔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어려우니.
지안 : 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기반 마련을 제안해 주셨는데 이에 대해서 공폐단단 안에서도 계속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고 말씀해 주신 부분들이 납득이 갔다. 사법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멀리 봐야할 문제 같고, 지금 당장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구체적인 현실로서 이 요구안을 더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은 : 갈무리가 필요한 시간이다. 향후 제안이나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신 분들 한마디씩 해주시면 좋겠다.
오매 : 공소시효 폐지 운동 역사를 살펴봤을 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상담소는 공소시효 제도 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해왔는데 그중 입법부가 챙겨간 것은 아동청소년과 관련된 부분이다. 여가부 전문위원 의견 보면, 친족관계 때문에 고소를 못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냐,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 연장도 있고 중지도 있는데 왜 배제하냐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13세 미만 및 장애인 성폭력 공소시효 배제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사안이 생기면 빠르게 통과된다. 입법부의 논리라는 것이 그렇게 논리적이지는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민들에게 우리의 요구를 폭넓게 알리고, 입법부에도 우리 의견을 계속 알리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주장을 현재의 버전으로 써 내려가는 게 그래서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와 같이 당면한 문제들도 법률가들과 함께 고민해나가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공폐단단이 지금까지 소수자운동과 연대해오고 지속적으로 활동해왔던 경험과 실력을 많이 발휘해 주시면 좋겠다. 우리는 이미 준비가 많이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신아 : 저는 오늘 관계에 초점을 둔다는 ‘관계성’이 저한테 제일 들어온 키워드였다. 비동의강간죄도 관계에 대해서 해석하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건데 법에서 관계를 보는 눈이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랑 : 저는 공폐단단 활동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고, 정말 멋진 활동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공소시효 폐지 문제를 더 확장해서 가족관계 안에서만 모든 삶이 이뤄지는 시스템 하에서 잃게 되는 권리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동은 : 생존자에 대한 사회적 기반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계속 강조함으로써 마련될 수 있을 것 같다. 생존자의 학업, 의료적 지원, 주거권이 사회적 책임으로 드러날 수 있는 말을 더 강조해야 할 것 같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란 : 저는 듣다 보니까 친족상도례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민법도 그렇고 혈연 중심으로 한 체계에 대해서 친족 내 성폭력인 경우 예외/특례 둘 만한 것들 따로 정리해두는 작업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등록열람제한 제도 보완, 친족 상속에서 유류분 제도 등 빠르게 개선할 수 있는 부분들은 정책 제언하면서 같이 병행해갈 필요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폐단단 SNS에 한달 활동 후기 컨텐츠가 올라오면 좋겠다.
민지 : 아 그것도 너무 재밌겠다! 할 일이 너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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