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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막장에 처한 결혼을 구하라 : 아내 강간 첫 유죄 판결을 환영한다.


 

이번 16일, 대한민국에서 헌정 사상 아내 강간에 대한 첫 유죄 판결이 났다.

이 말은 그 동안 아내에 대한 강간이 없었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다만 대법원은 그간 부부간에 이루어진 강제적 성행위에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번 부산지법 제5형사부(부장판사 고종주)의 판결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이러한 대법원 판례를 뒤집은 첫 판결이기 때문이다. 혼인 관계에서는 부부관계의 특수성과 민법상 동거의 의무, 즉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해야한다는 것이 피해자가 ‘아내’인 강간을 인정하지 않아왔던 공공연한 상식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아내강간 문제는 1993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쟁점이 되어왔으며, 실제 법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국회 법사위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이 법은 여자들이 맘 바뀌면 출근하는 남편 넥타이 끌고 경찰로 가라는 법이냐?"는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며 개정되지 못 했다. 급기야 한국 정부는 2007년에는 UN으로부터 친고죄폐지와 함께 아내강간 처벌을 하라는 권고까지 받기도 했다.



반면, 이번 판결의 내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법원이 “형법상의 ‘부녀’에 ‘혼인 중의 부녀’가 제외된다고 볼 근거가 없는 만큼 현행법으로도 부부강간을 처벌할 수 있다”며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이고, 아내에게도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강간죄의 보호법익은 ‘민법상 동거의 의무를 통해 유지되는 가족의 안정성’이나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내 여자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식의 발상에 경종을 울린다.



2004년 아내강제추행치상죄의 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부부라고 하더라도 성적자기결정권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부부이기 때문에 누구도 개입하기 어려워 피해가 지속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 이번 판결에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결은 아직 우리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수 많은 아내 강간을 중단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사실 ‘아내 강간’이라는 죄명는 형법에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형법상 ‘강간’이라는 죄는 존재하며, 성범죄로서 중하게 처벌된다. 다만 형법상 ‘강간’이라는 죄명으로는 남편을 처벌할 수 없었던 민법상 동거의 의무, 성관계에 응할 의무가 있어왔다. 하지만 ‘아내 강간 처벌 불가능’이라는 상식은 대법원 판례일 뿐 아니라, ‘남편을 강간으로 고소하는 여자는 문제가 있다.’ ‘강간은 정조 침해의 문제이기 때문에, 결혼하여 이미 정조를 잃은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이다.



그렇다면, 실제 한 여성이 자기 남편을 강간으로 고소하여 승소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살펴보자. 크게 세 가지 관문을 거쳐야 한다.



첫째. 남편을 강간으로 고소하여야 한다. 강간죄는 친고죄이니만큼, 본인이 직접 남편을 고소해야 한다. 남편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혼인 관계에서 요구되는 민법상의 동거 의무는 법조문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이후에 생기는 가족 관계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고, 부부싸움 이후 강간은 화해를 위한 제스쳐이며, 사회가 아무리 막장이어도 가정만은 따뜻해야한다는 상식은, 웬만한 용기와 배짱이 아니고서는 남편을 강간죄로 고소하기 어렵게 한다. 그 뿐인가? ‘네가 평소에 잘 했으면 남편이 그럴 것이냐?, 평소에도 얼마나 아내의 (섹스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 했으면 남편이 그랬겠냐?, 네가 그랬는데 남편이 밖으로 돌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는 등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곧바로 고소를 취하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이번 판결의 경우, 친고죄인 강간이 아니라 흉기를 사용한 ‘특수강간’이었기 때문에 이런 합의 종용은 덜 듣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다행스러운(?)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둘째. 어려운 과정을 거쳐 고소를 취하하지 않고, 검찰 수사 단계까지 진행되었다고 치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검사의 기소 여부이다. 기소가 되어야 재판이 열려서 남편의 유/무죄를 다툴 수 있다. 하지만 1970년 대법원이 아내 강간을 부정한 판례를 낸 이후 아내 강간은 검찰 단계에서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어왔다. 그랬기 때문에 39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첫 ‘아내 강간 유죄 판결’이 난 것이리라. 검찰 수사 단계에서도 경찰 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고소 취하 압력과 더불어, 남편을 고소할 만큼 스스로가 ‘정숙한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로서 살아왔는지에 시달리는 자기 검열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기소가 되어 재판이 열렸다고 생각해보자. 상대측 변호인은 십중 팔구 물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었길래 남편을 고소까지 하게 되었느냐?’, ‘성관계를 거부할 만큼의 특별한 개인적 이유가 있었느냐?’, ‘남편이 가장의 의무를 다 하느라 개인적으로 겪어온 고충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등등. 피고측 변호사의 질문과 더불어 남편이 재판부에 제출하는 반성문을 보며 고소인은 최고의 자기 분열과 자기 학대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아내 강간’에 대한 판결이 탄생할 것이다.



인간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한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에게는 마지막 비빌 언덕으로서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이 요구된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에게 남편을 강간으로 고소하는 일은, 가장 크게는 자신의 모든 사회적 지위를 걸고 하는 싸움일 것이다.



이번 판결에 대한 뉴스의 타이틀 중, 눈에 띄는 것은 이번 판결을 “성적 자기 결정권 존중”과 “가정 붕괴 촉진”의 팽팽한 의견 충돌로 보는 논조이다. 이것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 가정 붕괴를 촉진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가정 유지를 위해 여성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지/포기하게 하는지를 묻고 싶다. 성관계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이 가정 붕괴를 촉진하는 것이라면, 그런 가정은 좀 붕괴되면 어떤가? 결혼 서약을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상대의 의사와 상관 없이 성관계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결혼 당사자라면, 그 결혼 생활은 빨리 끝나는 것이 낫겠다. 그런 가정들은 모두 붕괴되고, 그 이후에 ‘관계 유지에 대한 개인의 의지와 상호 신뢰, 그에 기반한 책임’을 계약 조건으로 하는 혼인 관계가 생산된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그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결혼을 앞둔 모든 이에게는 ‘혼인 신고 이후, 상대를 강간죄로 고소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니, 상대가 자신을 강간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신중한 판단을 요함’이 권고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10대들에게는, 사실 결혼의 ‘일상’이란 M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가 아니라, 강간 이후의 억지 결혼,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가족 관계가 소재인 ‘막장 드라마’에서 그 실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미리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