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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낙태권, 가부장제 국가와 싸워라



낙태권, 가부장제 국가와 싸워라


이윤상 / 한국성폭력상담소


질문 하나-생명옹호론이 왜 현실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수정란, 배아, 태아. 이들의 생명권. 이것은 낙태시술을 받고자 하는 여성의 권리와 늘 대치되는 것이다. 생명권의 온전함과 위대함. 세상의 어떤 권리가 감히 생명권과 이해관계를 다툴 수 있을까? 그래서 낙태논쟁에서 생명옹호론자들은 항상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이런 생명옹호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낙태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낙태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보여주는 각종 조사결과도 종종 발표된다1). 낙태 찬반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는 낙태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일상적으로 만나는 내 주위 사람들 중에는 낙태를 했던 사람, 낙태여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질문 둘-낙태가 정말 살인일까?

생명권. 태아는 사람이니 낙태가 살인이라는 주장. 참 무겁다. 그런데 사실 우리 법체계에서 태아가 갖는 지위는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 법체계에서 태아를 사람과 동등하게 본다면 낙태죄의 형량2)은 살인죄와 동등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정말 이슈가 생명이라면 우리의 법3)은 어떻게 강간 피해로 임신된 경우 등에 예외적으로 낙태를 인정할 수 있을까? 법까지 가지 않더라도 강간피해로 인한 임신의 중절은 -심지어 생명옹호론자들 중 일부도- 너른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슈가 생명이라면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생명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살인을 해도 되는 예외적인 경우는 아주아주 극히 드물지 않은가?



질문 셋-섹스, 임신, 책임

그렇다면 관심은 생명이 아니라 임신이 된 동기에 있다는 걸까? 강간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성관계였다면, 성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임신도 의도했으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 결과는 의연히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모든 성관계의 ‘의도’에는 임신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나? 물론 모든 성관계에는 임신의 ‘위험’이 따르기는 한다. 굳이 ‘위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완전한 피임방법이 ‘아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과의 섹스에는 항상 원하지 않는 임신이 발생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의연히 책임지기 위해, 임신한 십대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고, 비혼여성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만 하고, 결혼관계 밖의 출산은 이혼을 감수해야만 한다. 생명의 위대함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감수는 당연하가? 그런데 그 위대함에 상응하는 책임감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왜 이리 혹독한 것인가?

모든 섹스에는 임신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으니 마땅히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면, 그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낙태한 ‘부녀’만을 처벌하게 되어있는 낙태죄는 성관계 당사자 모두를 단죄해야 공정하고, 모든 강간은 낙태미수를 얹어 가중처벌 해야 하며, 피임하지 않는 성관계 또한 마땅히 살인미수죄의 수위로 처벌해야 한다.

 

질문 넷-생명의 존엄함 vs. 섹스금지

모든 섹스에는 반드시 도덕적 판단이 함께 한다. 결혼제도 밖의 섹스, 성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십대의 섹스 등은 늘 ‘부도덕’의 부담을 안고 있다. 엄격한 낙태금지는 생명의 존엄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생명옹호론자들의 거룩한 소망과는 달리, 부도덕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이겨낼 자신이 없으면 섹스 하지 말하는 도덕명령의 역할을 한다.

생명옹호론자들의 섹스금지라,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가 않다. 생명이 핵심이면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야 하는 임신과 출산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맞다. 소리 높여 외치는 ‘낙태금지’ 구호에서 모든 이의 임신을 축복하고 있다는 지지의 메시지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문란한 성관계’를 개탄하고 있으니, ‘생명존중’ 뒤에 숨은 그 ‘의도’가 궁금할 따름이다.



질문 다섯-판결문을 들고 오라?

강간에 의한 임신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합법적으로’ 낙태 시술을 받으려고 했던 성폭력상담소의 내담자가 여성․학교폭력피해자원스톱지원센터4)를 통해 들은 대답은 ‘판결문 들고 와야 낙태시술을 하겠다’는 싸늘한 답변이었다5). 이미 법에서 인정하는 권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나? 게다가 그 대답이 ‘판결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어이없는 노릇이다. 일단 판결문을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이미 태아를 출산해야하는 시기를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다. 판결문이 아니고는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임신한 여성의 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임신 당사자의 선택권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화간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혐오만이 가득하다. 여성이 함부로 섹스하고 함부로 낙태할 것이라는 가정, 그 가정에는 여성이 함부로 섹스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임신은 감히 섹스를 감행한 여성이 알아서 책임져야 한다는 함의가 있다. 사회가 용납하기 어려운 출산은 외면하고 싶지만, 여성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일 의사가 없는 국가의 막무가내 오만함을 무어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비겁한 이중플레이? 가진 자의 거드름? 가부장성?



낙태금지와 국가의 행복한 만남

낙태금지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자유롭게 마음껏 출산하라’가 아니라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으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결국 낙태금지 명령은 생명권과 낙태권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처리하라’는 명령과 여성의 권리(선택권, 재생산권 등) 간의 갈등을 양산한다. 알아서 처리하려면, 완벽한 피임방법이 없으니 임신을 계획하지 않는 ‘대부분의‘ 섹스는 불안 속에 하든가, 그러다가 자칫 임신이 되면 국가 몰래 낙태를 하든가, 아니면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어도 기꺼이 낳아서 사회가 뭐라 하든 꿋꿋하게 알아서 키우든가, 이 중 하나다.

낙태금지명령은 어떠한 생명이든 환영한다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온갖 의무 방기는 눈감아주고 여성의 부담과 고통은 가중시키는 것 말고 한 게 무엇이냐고 되묻는다면 너무 혹독한 질문인가?



낙태비난, 누가 받아야 하나?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 개인이 마치 태아를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없어서, 자기 삶에 벌어지는 불편함을 견디기 싫은 이기적인 존재여서 그러는 양 낙태 비난 여론을 조성하지만, 정작 비난의 대상이 여성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태아의 존재감을 몸으로 느끼는 것도 여성이고, 태아를 ‘사람’으로 키우는 엄청난 사회적 노동을 실천하는 것도 여전히 대부분 여성 (엄마가 혼자 키우지 못하면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여성 베이비시터 등 여성의 노동력이 저임이거나 무임의 형태로 투입된다. 미혼모 시설 등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대부분 여성이다)이다. 그리고 임신 종결을 결정하는 것도 태어날 아이, 이미 태어나 있는 가족과 주변인, 여성이 감내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합적인 고찰 끝에 내리는 ‘책임있는’ 결론이다. 이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여성을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세우는 비난 여론은, 안전하게 아이를 맡길 곳 하나 찾기 힘들어 늘 폭력과 사고의 위험에 내몰려있는 아이를 둔 일하는 어머니의 불안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자신을 성폭행한 가족이 살고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 외에는 달리 갈 데가 없어 오늘도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누구의 책임인지, 그 존엄한 생명들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인지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

 

삶의 숭고함을 믿고 싶다.

한 번의 성관계로 만들어진 수정난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성의 몸은 10개월간 겉모양뿐만 아니라, 혈압, 호르몬 등의 극적인 신체적 변화를 견뎌야 하고, 이 기간에 생명을 잉태했다는 찬사는커녕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식의 사회적 편견을 견디면서 임금노동을 지속해야 한다. 출산 후에는 24시간 아이에게 매달려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일에서부터 아이의 감정을 살피는 감정노동까지 감당해야 하며, 그 생명을 우리 사회의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고, 아이의 건강, 심리적 상태, 안전과 안녕, 개성과 욕구 등을 총괄적으로 살펴야 한다.

이런 복잡한 돌봄노동을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 정성이 투여되어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 이것을 실천하는 과정 자체,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며, 숭고한 삶을 영위해야 할 권리와 의무 때문에 우리네 삶의 고단함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2008년은 1997년의 경제위기와 맞먹는 혹은 그 이상의 고단함이 시작된 해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로 우리사회의 자살률은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앞으로 얼마간 지속될 경제고가 뻔히 눈앞에 보이는데, 어찌해야 하나 마음이 불안하다. 우리사회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보도를 보면서, 체계적으로 자살로 몰아넣는 우리사회의 병폐에 마음이 섬뜩하다. 지나친 경쟁과 입시부담 때문에 자살하는 10대, 생활고 때문에 자살하는 부모들, 자식들에게 짐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목숨을 끊는 노인들, 이건 더 이상 한 개인,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면서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라고 할 수 있나. 태아에게 숭고한 삶을 약속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나. 숭고한 삶을 죽음으로 내모는 무기를 옆에 두고 외치는 낙태금지가 우리 사회에 던질 수 있는 울림이 무엇일까.   

원하지 않았던 임신 사실을 알고 고민해야 했던 수많은 시간, 낙태를 선택해야 했던 힘든 순간,  우호적이지 않은 사회적 시선과 거의 무(無)에 가까운 복지환경 속에서 임신/출산/육아를 실천하는  힘든 경험, 이 모든 것은 바로 숭고한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한 시간과 실천이며, 삶의 숭고함 그 자체다.  

 


삶은 숭고하므로, 어떠한 생명도 비난과 편견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엄연히 존재하는 곱지 않은 사회의 시선 때문에 발생하는 갖가지 문제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그 삶의 숭고함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의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순간이나 배아가 세포분열을 하는 과정을 절대화하는데 힘쓰기 보다는, 태아가 우리 사회에서 숭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회공동체가 해야 할 의무를 고민하고 실천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계간지 <나눔터> 61호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다시 작성하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한 릴레이 시민토론 4차 토론회 "낙태금지법의 가부장성을 묻다"에서 발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