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개소 20주년을 맞아 반성폭력운동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오랫동안 반성폭력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이 모여, 그간의 경험과 문제의식, 각자가 생각하는 우리 운동의 향방에 대해서 가감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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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한국성폭력상담소 모임터
<함께 이야기 나눈 활동가들>
-이윤상(한국성폭력상담소)
-이임혜경(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문채수연(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여성주의실천연구소)
-배복주(장애여성공감)
이윤상(이하 이): 오늘 좌담회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 20주년 기념 특별판 <반성폭력>(2호)의 기획특집을 위해 마련된 자리고, 여기서 ‘반성폭력 운동의 쟁점과 미래’에 대해 거침없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언론, 사례공개 하기 싫다는 내담자, 성폭력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활동가 사이에서 우리가 가지는 고민은 깊어져 가는데, 그런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나누는 기회는 적었던 것 같다. 오늘 우리 고민을 가감없이 내놓는 용기 있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어느덧 막강해진 ‘성폭력’이란 말, 여성의 몸을 더 보호하게 만드는 건가?
이윤상(한국성폭력상담소)
이: 성폭력이라는 말을 여성단체가, 우리가 열심히 만들고 확산시키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 개념을 우리가 너무 무겁게 만든 건지, 아니면 성을 둘러싼 기존의 사회적 통념 때문에 이렇게 무섭고 기계적인 개념이 되어버린 건지. 여성단체가 무겁게 만든 게 훌륭하지 못한 전략이라면, 우리 전략을 재점검해야 하는 때가 됐나?
이임혜경(이하 이임): 재점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가 20년 이상이 흘렀고, 성폭력 개념은 어느덧 언론이 장악했다. 성폭력이라고 하면 무섭고 끔직한 사안만 보여주니까 사람들 머릿속에는 그것만 각인되고, 성차별적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문제를 성폭력을 통해서 부각시키려고 했던 우리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2008년에 정몽준 국회의원 후보가 여성기자 뺨을 만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민우회는 많은 고민 끝에 여성단체 성명서 연명에서 빠졌다. 이 사건을 ‘성차별적 행위’라고 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텐데, 성희롱이라고 해서 손쉽게 받아들여진 거 아닌가. 어느 노조에서 몸싸움하다가 여성 노조원의 가슴을 스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성폭력’이라고 명명하니까 갑자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더라. 이런 식으로 성폭력이 이용당하는 게 여성을 위해서도, 운동의 전략상으로도 좋지도 않다고 본다. ‘성폭력/성희롱’이 여성의 몸을 더 보호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나. 우리 운동이 여성의 몸을 부끄러움의 대상,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모든 문제가 ‘성폭력’으로만 환원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돼
이임: 내담자를 만나다 보면 무리하게 자기 문제를 ‘성폭력 문제’로 가져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얘기를 내담자나 다른 사람에게 못하는 이유는 이런 고민들이 자꾸 피해자 비난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문채수연(한국여성의전화)
문채수연(이하 문채): 내가 고민했던 것도, 분명 성폭력으로 말하기 힘든 사건인데 당사자는 성폭력으로 정의하고 시작하는 거다. 그런데 성폭력이라고 말하는 게 당사자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거였다. 법이나 제도로도 보호받지 못하는데 계속 법과 제도에 의지하고. 성폭력으로 말하지 않고도 자신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다. 괴로움, 배신, 실연, 분노, 복수 같은 말로. 당사자는 ‘그럼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거냐, 없다는 거냐’ 이것만 묻는다. 여성들의 상황을 좀 더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성관계와 성폭력이 연속선 상에 있지만, 그 중간 경계를 어떻게 설명해 내야 할까 고민이 든다.
이임: 이걸 외부에 얘기하기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성폭력 상담이 95%라면 이런 사례는 사실 5% 정도인데, 여성을 폄하하고 선정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언론들이 5%를 잘못 다루어서 95%가 은폐되거나 사라지는 결과가 날까봐 두렵기도 한 거다.
화학적 거세와 전자발찌, 왜 입장을 말하기 어려웠나?
이임: 성폭력 법제화는 우리의 요구였고 필요한 것이었고, 형법 상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법제화가 오히려 여성의 몸 옭아매는 결과를 낳기도 했는데, 그걸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큰 흐름이 있었던 거 같다.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고만 하면 아무 소리 못하게 하는, 마치 아킬레스건 같은 게 있다.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신상공개에 대해서 우리 입장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
문채: 정면 싸움과 다양한 논의, 이 쟁점을 애써 피해간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 순간에 우리가 눈치를 보고 몸을 사렸던 거다. 왜 그런 건가?
배복주(이하 배): 우리가 인권을 운운하면, 사람들은 바로 “너희 하는 일이 뭐냐? 가해자를 옹호하는 거냐?” 이렇게 나오잖나. 선택지가 두 개 밖에 없다. 피해자냐, 가해자냐.
생존자와 같이 도모하고 제안할 것은?
이: 반성폭력 운동에서 상담은 운동의 주요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출발하면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성폭력 피해 실태를 알려냈고, 그것을 바탕으로 법과 제도의 필요성을 알려내고, 잘못된 통념에도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다.
이임혜경(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이임: 상담은 중요했고 지금도 중요하다. 다만 법과 제도를 뛰어넘는 상담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내담자는 지금 당장이 시급하고 비밀에 부쳐야 하고, 우리는 그 원칙에 집중해서 사건을 지원한다. 그런데 내담자와 그 이상 뭔가 도모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한계다. A(에이) 말고 이를 넘어서는 A'(에이 다시)도 해야 하는데, A'(에이 다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역량의 한계. 나는 이것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 초기에 성폭력상담소를 찾아온 내담자는 그 단체의 동지였는데, 요즘에는 ‘소비자’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은 제도와 정책이 마련되었으니까 소비자로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그 사람들이 소비자가 된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소비자로 머물게 한 우리 운동의 한계를 보아야 한다. “치료비 300만원 드립니다. 법률 연계해 드립니다. 우리 끝까지 지원합니다. 경찰동행합니다.” 이런 제도적 상품, 즉 서비스는 물론 필요한 건데, 이것 말고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여기서 답답함을 느낀다. 제도화 이후의 흐름을 우리가 주도하지 못했다.
서비스가 아닌, 여성운동으로서의 상담 현장
배: 우리가 스스로 필요한 시점에서 점검하고 방향 전환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것은 바로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제도화의 여파인 것 같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이 제도화 되면서 반성폭력운동의 상담을 서비스화했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질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 예산 확보해라, 제도 만들어라, 하면서 현장에 있는 대다수의 상담하는 사람들이 여성운동가가 아니라 사회복지 서비스의 제공자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 제도화고.
문채: 지금은 제도화를 넘어서는, 운동을 확장하고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많은 상담소가 실적(상담 건수가 실적)에 치우쳐 있는데, 내용이 풍부한 상담을 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법과 제도적인 틀 안에 들어오기 힘든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문제다. 반성폭력운동이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태어났는데, 처음 출발할 때의 미션을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의 활동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방식으로 제도화가 작동하고 있는 흐름 같은 것들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배: 우리가 새로운 길을 못 찾는 것이, 이슈화의 키를 언론에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면 새로운 사례와 이슈를 끄집어내고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의 키 자체가 없다. 성폭력 이슈는 언론의 매뉴얼대로 가고 있다.
이: 운동을 하면서 언론을 잘 이용하는 것도 중요한데, 우리가 적절한 시점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이슈를 잘 제기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못한 이유가 뭘까? 제도 안에서 용기있게 목소리를 못 낸 것, 또 대중들의 지지를 못 받을까봐 실제로 눈치 보기 하는 면이 있지 않았나 싶다.
배: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서는 왜 변해야 하는지,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작업을 아직 못 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근거와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전술을 세워서 차근히 하면 국민적 합의도 이룰 수 있다.
법과 제도를 넘어 문화와 인식의 빈 곳을 어떻게 공략할까
이: 문화를 바꾸고 인식의 변화를 도모하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가치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것이 우리 활동의 방점이 되어야겠다는 것으로 우리 의견이 많이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배복주(장애여성공감)
배: 성폭력운동에서 피해자중심주의 이야기하는데, 장애인 운동에서 말하는 당사자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다. 당사자의 감수성과 입장이 경청되고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당사자주의는 매우 중요하지만, 이게 ‘당사자 말이 정답’이라는 식으로 왜곡되면서 폐해도 낳고 있다. 당사자주의라고만 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결과. 그래서 A'를 못하고, A에만 머물게 된다. 피해자중심주의도 자칫 왜곡된 당사자주의의 문제점에 봉착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임: 그래서 민우회는 피해자중심주의가 아니라 피해자 관점이라는 말을 쓴다.
배: 우리가 20년 간 만들어낸 용어, 단어를 점검해야 한다. 초기에는 어떤 취지로 만들었는데, 현재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가해, 피해, 2차 가해․피해, 피해자, 가해자라는 용어도. 반성폭력운동, 성적자기결정권, 성교육, 성 권력, 젠더 권력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 해야 한다.
이임: 사람들은 성폭력을 법적인 용어로만 알고 있다. 일상의 문제, 관계의 문제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서는 연구자가 아니라 활동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활동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를 정리해서, 학문적인 말 말고, 일상적이고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단어를 발굴해내고 설명해야 한다.
동지들의 마무리 발언
배: 장애인 운동도 복지 수혜자 패러다임에서 당사자들이 자기 권익을 요구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데 수 십 년이 걸렸다. 여성운동도, 반성폭력 운동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고착화되었는데, 여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의식이 있는 것은 확실하니까 그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른 방법이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임: 한계를 짚었고, 이후에 어떻게 해야 될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말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문채수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 자리에 소심한 사람이 왔는데, 대담한 이야기를 했다. 나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운동 내용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법에서 포함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사안들-무고죄, 데이트폭력, 스토킹 문제 등-에 좀 더 천착해야 시점이라고 본다.
이: 바쁜데도 이렇게 좌담회에 참석해준 동지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하고, 가감없고 검열 없는 말씀에 더욱 감사하다. 나는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내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 오늘이 자리가 용기있게 주저없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동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록 및 정리: 가온(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
가온(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
*가온의 소회
“성폭력이 깔때기냐”, “그거 성폭력 아니잖아요”, “가해자도 인권이 있잖아요?” 이런 이야기들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거봐라, 그거 성폭력 아니지 않느냐’는 가해자 옹호에 쓰이기 쉽지요. 하지만 반성폭력운동에 10년, 20년을 헌신하고 있는 그녀들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결론은,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 하려면 20년은 운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법이 아니라 동지가 필요하다는 것, 동지에 대한 신뢰가 있어 눈치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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