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2일, 새로 지은 상담소 건물 지하 1층 이안젤라홀에서 부설연구소 울림의 월례포럼을 개최하였습니다.
[성폭력없는 세상을 만드는 시민강좌2: 이론, 정책, 쟁점 톺아보기] 그 첫 번째 순서로 전 대구지법 성폭력전담판사이시자, 예일대 로스쿨 박사 과정을 마치신 신윤진 변호사님을 모시고 인신매매와 노동이주의 경계와 중첩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날은 이안젤라홀이 완성되고 처음 외부 분들을 초청하는 설레는 자리이기도 했는데요,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포럼이 더욱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6 필리핀 이주여성
이 날 신윤진 변호사님께서는 배경부터, 문제의 현황, 복합적 맥락과 대책까지 정말 광범위하고도 자세하게 이야기를 전달해주셨습니다. 그 날 진행을 맡으신 울림의 정운 연구원이 나눠주셨듯 인신매매라 하면 한밤 중 검정 봉고차에 의해 납치를 당하는 모습이, 노동이주라 하면 산업현장의 근로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단번에 쉬이 연결점이 떠오르지 않는 이 둘이 어떤 경계와 중첩에 서 있다는 걸까요?
주제의 주인공은 일명 ‘연예인비자’라고도 불리는 E-6 비자를 통해 한국에 오게 된 필리핀 이주여성입니다. 이 여성들 중 많은 분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한국행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 노래를 불러보기는 커녕 미국기지촌에서 성산업에 종사하는 인신매매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걸까요?
가수 지망생에서 성산업 종사자가 되기까지...
예술 흥행 비자라고 하는 E-6 비자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E-6-1은 방송 출연 예정인 연예인, E-6-3는 운동선수를 위한 비자입니다. E-6-2가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에 오기 위해 취득하게 되는 비자인데요, 일명 ‘가수 비자’로 1996년 관광진흥법상 관광편의시설업의 일종인 ‘외국인전용 유흥음식점’에서 외국인 공연자를 초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여, 이에 따라 관광업소에서 종사할 예정인 외국인은 E-6-2비자를 취득하여 입국하게 되는 것입니다. 필리핀 여성들은 현지의 해외고용 알선업체를 찾는 것으로 한국에 공연이주노동자로 가기 위한 절차를 시작합니다. 여성들은 실제로 오디션도 봅니다. 발탁된 여성들은 노래하는 영상이 담긴 자료를 문화체육관광부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제출하여 심사를 받습니다. 법무부의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영등위의 심사를 통과하여 추천서를 발급받은 여성들에게 사증발급인정서를 부여합니다. 여성들은 사증발급인정서를 필리핀의 한국대사관에 제출하고 인터뷰를 받은 뒤 E-6-2 사증을 발급받고 한국에 입국하게 됩니다. 입국 후 여성들을 약속된 곳과는 너무도 다른 미군기지촌 술집에 넘겨집니다.
다시 말해, 이 여성들은 실제로는 유흥접객원으로 고용된 것입니다. 유흥접객원이란 식품위생법 시행령에 따르면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를 말합니다.
참여자분들의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
주스쿼터와 바파인
필리핀 E-6 여성의 노동 실태는 정말 경악스러웠습니다. 주스쿼터(juice quarter), 바파인(bar fine)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술집 업주는 먼저 여성들의 임금을 체불합니다. 그리고는 일정 기간 동안의 주스쿼터를 할당하고 기간 안에 그 주스쿼터를 채워야 돈을 준다고 합니다. 주스 쿼터를 채우기 위해 여성들은 음료를 팔아야 합니다. 보통 약 300~500점 정도의 주스쿼터가 할당되는데 음료만 팔아서는 30점정도 밖에 채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매매로는 한번에 30~50점을 채울 수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경제적인 취약성을 이용해 교묘하게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인 셈이지요. 그렇다고 여성들이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포주는 이 중 8할을 가져갑니다. 하지만 포주가 돈을 가져가는 것은 민법상 명백한 불법 행위입니다. 또 비자 신청권을 여성이 아닌 기획사나 고용 알선 업체가 갖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여권 압수는 물론이고, 하루에 한 두시간 그것도 감시인의 동행 하에서만 외출이 가능한 생활통제, 자유제한, 지각 시 벌금제도, 폭력과 협박, 건강권 침해 등 너무나도 열악한 노동 및 생활환경에서 여성들은 기본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E-6 비자 입국자들은 근로기준법상 비전문인력으로 구분되는 E-9비자 입국자들과 달리, 전문인력(예술인)으로 분류됩니다. 따라서 외국인근로자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권리도, 최저임금법과 그 외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도 없습니다. 더불어 이에 기인한 또 다른 문제는 성매매 종사자라는 낙인으로 이주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마저 소외당한다는 것입니다. 타국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회적인 네트워크도 없는 셈이지요. 더욱이 우리나라 형법상 성매매가 불법이기에 처벌 가능성 때문에 피해 여성들 스스로 피해 신고를 꺼리기도 합니다. 현재 E-6 필리핀 이주여성들은 그야말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인신매매와 불법성
국제적 정의에 비춰봐도, 우리나라의 개정 형법 및 성매매처벌법에 의거해서도 필리핀 E-6이주여성에 대한 처사는 명백한 인신매매입니다. 다음은 유엔의 국제범죄에 관한 조약의 부가조약에 나오는 인신매매의 정의입니다.
“Trafficking in persons” shall mean the recruitment, transportation, transfer, harbouring or receipt of persons, by means of the threat or use of force or other forms of coercion, of abduction, of fraud, of deception, of the abuse of power or of a position of vulnerability or of the giving or receiving of payments or benefits to achieve the consent of a person having control over another person, for the purpose of exploitation. Exploitation shall include, at a minimum, the exploitation of the prostitution of others or other forms of sexual exploitation, forced labour or services, slavery or practices similar to slavery, servitude or the removal of organs;
국제적 정의에서 특히 주목해 볼 점은 밑줄 친 부분에 있는데요, 착취를 목적으로한 기만과 속임을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사실상 인신매매는 기만이나 사기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일의 성격을 속이는 것 뿐 아니라 노동 조건이나 환경을 속이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매매처벌법 제2조에서 인신매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처벌합니다.
"성매매 목적의 인신매매"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가. 성을 파는 행위 또는 「형법」 제245조에 따른 음란행위를 하게 하거나, 성교행위 등 음란한 내용을 표현하는 사진·영상물 등의 촬영 대상으로 삼을 목적으로 위계(僞計), 위력(威力), 그 밖에 이에 준하는 방법으로 대상자를 지배·관리하면서 제3자에게 인계하는 행위
또 우리나라의 최근 개정 형법 제 228조에서 영리의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 또는 유인한 사람, 노동력 착취, 성매매와 성적 착취, 인신매매를 한 사람을 각각 처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진행을 맡아주신 연구원 정운님(왼쪽)과 신윤진 변호사님(오른쪽).
피해자 인정의 어려움
하지만 E-6 필리핀 이주여성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현재까지 검찰에서 인신매매를 인정한 사례도 전무합니다. 많은 경우 불기소의 큰 이유 중 하나는 인신매매와 이주에 대한 사법기관의 몰이해입니다. 구조적 취약성은 무시하고 성매매 강요 유무, 물리적 감금이나 폭력의 유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혹은 이주여성의 상황적 취약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발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또 피해 여성 한 명과 업주를 포함한 다수의 고용자를 대질조사하는 것이 보편화돼 있고, 현재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진술이 주요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용주가 함께 한 자리에서 이들의 진술은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일까요?
피해자성의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주체성을 발현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로, 피해 상황 앞에서의 완전 무력과 같은 정형화된 피해자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좁은 인신매매의 정의 아래 포함시키지 않는 식입니다. 인신매매 문제는 동의나 자발성의 잣대로 단순화하기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이 여성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실제로 모든 여성이 가수가 될 것을 기대하고 한국행을 결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여성들은 모국에서 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술집에서 일하게 될 것을 알고도 한국으로 이주합니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에 대한 처사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앞서 여성들의 노동 실태와 착취 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렸듯이 이 분들은 인권 억압과 차별의 피해자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요구되는 형법의 특성 상 성매매피해자로 분류될 수 없다 하더라도 노동법과 민법에 비춰 보았을 때 명백하게 부당한 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서 있는 경계와 중첩
어려움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여성들은 미국기지촌이라는 일터의 모호한 관할 때문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필리핀 간의 정치적, 젠더, 인종적 얽힘 안에서 더욱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주자이기에 외교부, 인신매매와 관련이 있기에 법무부, 또 표면상 외국인전용 유흥음식점의 공연자이기에 식품안전부와 문화체육관광부까지 관련 정부 부서가 너무나 많습니다. 꼬집어 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책임 떠넘기기 역시 용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 이들을 연예인으로 볼지, 공연자로 볼지, 유흥접객원으로 보아야 할지 그 기준이 모호합니다. 더욱이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노동이주자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불법적인 인신매매의 정황이 드러나는 등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민사상, 노동법상으로는 원고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문화적 해방 등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개인의 입장과 국경 통제 등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려는 주권국가의 입장이 경계를 이룹니다. 특히 미국을 선두로 하여 지구화되어 가는 국제적 반인신매매 풍조를 집약한 3P(prevention, prosecution, protection)와 4R(rescue, rehabilitation, repatriation, reintegration)은 보호(protection), 구출(rescue), 재활(rehabilitation), 본국 송환(repatriation), 재통합(reintegration) 등 그럴듯하고 긍정적인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각각 이주자에 대한 국경 강화, 단속, 감금, 강제 추방, 재이주방지정책으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주한 국가보다 경제적, 문화적 환경이 열악한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은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가장 원치 않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인신매매 피해자로 인정이 되면 이들에게 가장 먼저 내려지는 조치는 추방과 다름없는 본국 송환입니다. 본국 송환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더 나은 삶을 바란 이들의 주체적인 선택은 잘못이 아닙니다. 책임은 그들을 맞이한 기만적인 노동 조건과 제도, 그리고 이를 악용한 사람들에게 물어야하지 않을까요?
진지하고 활기찼던 Q&A 시간.
대책
가능한 대책으로 여러 논의가 있지만 각각 장단점이 있어 더욱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합니다. 먼저 포럼에서 신윤진 변호사님께서는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해주셨는데요, 첫째는 ‘제한적 발급’, 둘째는 ‘E-6-2비자 발급 전면 중단’, 셋째는 외국인근로자고용법 적용입니다.
제한적 발급은 현행대로 비자를 발급하되 실질적인 심사와 규제를 강화하여 그 기준을 더욱 엄격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자 목적 외 고용 업소에 대한 발급을 금지하고 블랙리스트를 관리하는 등 법무부의 출입국관리법 위반 규제를 강화하고, 노동부의 근로 감독도 강화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이 대안은 정부의 해결 의지가 명확할 때 가장 효과적일 것입니다. 둘째는 외국인전용유흥업소에 대한 외국인 고용을 전면 금지하는 방안입니다. 이 경우 앞으로 같은 문제는 예방할 수 있겠지만, 현재 일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정당한 대안이 무엇일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세 번째 외국인근로자고용법 적용은 외국인전용유흥업소에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을 계속 허가하되, 최소한 외국인근로자고용법에 규정된 이주노동자로서의 법적 지위, 권리와 보호를 누릴 수 있게 하는 방안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비자 발급 대상 직종 범위를 얼마나 확대하고 제한할 것인지, 대안적 비자의 종류는 무엇인지를 신중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마치며
이처럼 E-6 필리핀 이주 여성들은 짙은 경계와 중첩에 서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문제 해결의 길 역시 복잡다단합니다. 더욱 통합적이고 맥락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피해자’ 혹은 ‘범죄자’의 프레임 안에 여성들을 가두기 보다, 인권과 법적 권리의 주체로 여성들을 기억하는 것, 실질적인 권리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인턴 송윤정 님이 작성하였습니다.
'상담소는 지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가족부는 성소수자 배제하지 않는 성평등정책을 추진하라! (0) | 2015.10.20 |
---|---|
[2015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 뒤집기 2차 좌담회] '업무상 위력 개념과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불이익(보복행위)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다시보기' 후기 (0) | 2015.08.24 |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1차 포럼 참석 후기 (0) | 2015.07.08 |
제16회 퀴어문화축제에 다녀왔어요! (0) | 2015.06.30 |
데이트성폭력에 대한 번역서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가 나왔습니다! (0) | 2015.06.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