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야 할 것은 화장실이 아니라 증오!
-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
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인근 노래방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흉기를 소지한 범인이 어느 ‘여자’든 화장실에 들어오기를 기다린 1시간 동안, 남성으로 보이는 6명이 화장실을 이용했다. 피해자는 ‘첫 번째 여성’이었다. 살인의 이유는 ‘여자가 무시해서.’ 범인은 여성 전체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일면식도 없는 어느 여성을 죽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남역을 뒤덮은 여성들의 목소리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추모제 (5월 22일)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애끓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추모의 벽이 만들어졌고 국화 꽃다발 외에도 피해자에게 전하고 싶은 갖가지 물건들이 포스트잇 메시지 아래 가득 쌓였다. 여성들은 말했다. “이곳은 우리 모두의 무덤” “더 이상 죽지 않겠습니다. 더 보란 듯이 살아나가겠습니다.‘ 추모제 참여자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살아남았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평등을 말하며 범죄를 용인하는 위선”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여성들은 일상을 나눌 때도 ‘성추행 경험이 없는 여자는 없겠지만’이라는 말로 운을 떼곤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15년부터 길거리괴롭힘 소멸 프로젝트 <넌!진상>을 진행하면서 길거리에서 ‘가슴 한쪽을 움켜쥐’거나 ‘그렇게 옷 입으면 좋아?’ 라는 시비, 난데없는 호통과 폭언을 당한 여성들의 경험을 접해왔다. 지난해 7월, 한 남성이 옆테이블 손님에게 성별을 캐묻다가 맥주병으로 폭행한 사건은 사실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이다. 공공장소는 괴롭힘과 폭력의 공간이었다. 집도 그랬다. 성차별적 환경, 가족 내 폭력들…. 때때로 보호자를 자처하는 성인/남성은 가장 은폐된 가해자였다.
지난 며칠간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은 것은 피해자가 ‘나일 수 있었다’는 처절한 절규다. 단지 특정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물리적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사건을 밤낮으로 떨쳐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추모의 공간조차 모욕과 물리적 위협이 침범해왔고, 목소리를 낸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신상이 털려 협박을 받고 있다. 추모조차 공격 받는 이 사건은 반드시 우리사회의 혐오발언과 증오범죄(hate crime) 종식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공용화장실의 문제가 아니다
'나쁜 여자들의 밤길 걷기' 참여자
일부 언론은 가장 먼저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주목했다. 그리고 공용화장실에서 다른 괴롭힘이나 폭력 피해가 있었는지 여성들에게 질문했다. 대답은 (예상할 수 있듯이) ‘있었다’이다. 서울시는 화장실 전수조사를 해 공용화장실을 남녀화장실로 시정조치하도록 했고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리 모두 이 문제가 공용화장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공용화장실을 남녀화장실로 변경하면 여성들에게 더 안전할까? 그런 기대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보긴 어렵다. 대개 우리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대가 더 ‘위험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밤의 길거리도 대낮의 집도, 혼자 사는 것도 같이 사는 것도 ‘위험하다.’ 도처가 위험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용인될수록 모든 공간은 꼭 그만큼 위험할 수밖에 없다.
안전은 공공장소에 제한구역을 만들거나 남성은 여성의 공간에, 여성은 남성의 공간에 드나들지 말자는 규칙을 통해서 보장되지 않는다. 외출과 이동을 자제하는 것을 통해서는 더욱 더 아니다. 모든 곳에 성별을 분리하는 칸막이를 칠 수도 없고, 쳐서도 안 된다. 여성으로 특정되기만 하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성별에 따른 공간분리가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폭력은 그런 방식으로 통제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한 폭력이 어디든 비집고 드는 반면, 공간의 분리를 주장할수록 사회적소수자는 문책을 당하게 된다. 왜 남자들이 많은 공간에 갔느냐고. 성별에 적합한 곳에만 있어야 한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일상의 공간을 내줘서는 안 된다. 물러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
괴물은 우리사회가 키운 차별과 혐오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추모 참여자 인권침해 공동대응을 위한 여성단체 기자회견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은 우리사회 ‘여성혐오’의 모습을 낱낱이 불러낸 사건이다. 강력범죄 중 흉악범죄의 피해자 85.8%가 여성인 현실(2013년 경찰범죄통계). 한국여성의전화의 ‘2015 분노의 게이지’에 따르면 2015년 한해동안 언론보도된 사건 중 남자친구나 남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91명이다. 추모 참여자들은 이러한 여성살해와 여성폭력의 원인이 ‘여자가 무시하면 때리거나 죽여도 된다’는 발상과 그러한 행위가 사소하게 여겨지는 사회인식이라고 외쳤다.
반면 언론은 처음부터 범인의 정신질환을 강조했고 경찰은 사건 발생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혐오범죄가 아직 대한민국에는 없다”고 못 박았다. 정신질환으로 선긋기를 한 것이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정신질환자의 범죄위험도 체크리스트를 경찰 일선에 배포하여 필요시 정신질환자를 ‘행정입원’ 조치하며, “정신질환자의 퇴원에 구체적 요건을 정하고, 보건소나 경찰관서와 네트워크를 만들어 정기 점검하는 체제를 반드시 구축”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정신질환자가 강력범죄의 원흉으로 지목되었다. 통념과 달리 조현병 환자의 범죄율이 높지 않으며 ‘비질환자의 범죄율보다 낮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같은 날 대한신경정신의학회도 이 점을 지적하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이 커지면 환자와 가족은 낙인으로 인해 질환을 인정하기 더 어려워지고 돌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갈 가능성이 높으므로 편견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성들이 두려워한 것은 공공장소에서 언제든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여성들이 불안해한 것은 범죄자를 ‘미래가 창창한 청년’이라는 수사로 싸고돌며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한국의 수사사법체계였다. 그러나 상황은 마치 공용화장실이라는 위험한 공간에 피해자가 가지 않으면 범죄가 예방된다는 식으로 단순화되고 있다. 범죄자의 압도적 다수가 괴물이 아니라 어디서든 우리와 같이 살아가고 부딪히는 ‘평범한’ 존재라는 데서 오는 절망감은 ‘그럼 그렇지, 가해자는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닌) 미친놈.’ 이라는 ‘정해진 결론’ 앞에 더 커졌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 참여자가 남긴 포스트잇 메시지
사회적소수자 집단 전체를 멸시, 폄하, 위협하는 언동을 하거나 증오범죄(hate crime)에 이른 경우, 이는 해당 집단에 속하는 구성원 전체의 존엄성을 공격하고 일상생활에 공포심을 유발하는 등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증오의 중단이다. 여성이라는 사회적소수자를 향한 ‘증오’를 단지 다른 방향으로 치워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증오가 대체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증오를 중단할 수 있는 구체적 대책을 요구한다.
증오범죄(hate crime)를 ‘관용 없이 강경처벌’하고, 공공연한 혐오발언을 촘촘하게 규제할 수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차별금지법은 보수종교계의 이해관계로 인한 방해공작으로 번번이 제정이 가로막혔다. 시민사회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가 ‘시기상조’로 여겨져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의 소수자혐오는 위험수위다. 사회적소수자를 모욕하고 저주하는 혐오표현이 언론매체 광고를 차지하고 정당 공보물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UN 여성차별철폐·인종차별철폐·사회권규약·아동권리위원회 등이 2007년 이후 수차례 이상 강력히 권고한 사항이기도 하다. 언젠가 만들어야만 할 법, 어서 제대로 만들자.
글_잇을 (성문화운동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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