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바꿔준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덥고 더웠던 이번 여름! 우리는 더위에 굴하지 않고 <일상을 바꾸는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위해 화요일 저녁마다 만났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펀치를 날리고, 킥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며 8주를 꽉 채웠죠. 일단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8주 내내 엄청 재밌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몇 장면들을 후기를 통해 나눠볼까 합니다^^
하나. 서프레짓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의 시조새 언니들!
첫째날, 워크샵 시간에 제 마음을 가장 두근거리게 한 건 서프레짓수(suffrajitsu) 언니들이었습니다. 1910년대 서프러제트 언니들이 주짓수를 배워 몸훈련을 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이디스 가루드(Edith Garrud) 언니가 일본인에게 주짓수를 배웠고 여성들을 조직해서 주짓수를 훈련했대요. 30여 명 정도의 ‘보디가드’를 꾸려 바바리 안에 곤봉을 숨기고 다니다가 경찰의 진압 작전에 맞서 싸웠다고 해요! 너무 멋있지 않나요? 그 다음날 바로 서프레짓수(suffrajitsu)를 검색해서 그 시절의 사진들을 감상했습니다. 언니들의 화려한 1910년대 옷차림과 용맹함이 조화를 이루는 멋진 사진들이 많으니 검색해 보시길 강력 추천합니다!
둘. 무게중심을 이용해 상대를 무너뜨리기!
둘째날에는 고재경 선생님과 몸훈련을 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는 ‘긴장성 부동화’ 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훈련을 했어요. 상대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몸을 이동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도 훈련도 했고요.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콕 집어서 도움을 요청해보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훈련 중 제 맘을 확 끌어당긴 훈련은 힘의 원리를 이용해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 누군가 내 팔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할 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버티게 되잖아요. 그 상황에서 내가 상대보다 힘이 약할 경우에 질질 끌려가게 되는데요. 그럴 때 오히려 상대방 쪽으로 몸의 중심을 확 이동하면 상대가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파트너와 함께 역할을 바꾸어 해봤는데, 상대방이 날 무너뜨리려하는 걸 예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손쉽게 휘청거리게 되더라고요.
자기방어훈련을 한다고 하면 “(남자보다) 여자는 힘이 약한데 그게 되겠어?” 라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지만 힘의 세기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게 이렇게나 많은데... 아니 대체 왜 이런 실용적인 기술을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안 가르쳐주는 걸까요? 왜 자꾸 약하니까 안 될 거라고만 하는 걸까요?
예전에 잠시 택견을 배웠는데 무조건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상대와 나의 무게중심을 이해하고 그걸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이길 수 있더라고요. 이 날 수업을 듣고 다시금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몸의 원리를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라는 목표를 가지고 당장 셀프디펜스를 수련할 수 있는 도장을 찾아 수강생이 되었습니다! (저 외에도 8주의 과정을 듣는 와중에 운동을 등록한 분들이 많더라고요^^)
셋. 여성주의자에게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 꼭 필요한 이유
그 뒤로도 이어지던 워크샵과 몸훈련의 나날들...7주 째의 워크샵이었던 것 같습니다. PPT에 이런 화면이 떴어요.
‘음? 저게 뭐지?’ 속으로 생각했죠. 이어진 설명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알기’는 여성주의를 접하고 나면 더 많이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게 있다는 거에요. 어떤 것이 문제인지 어떤 것이 나를 침해하는 것인지 더 알게 되고, 뉴스와 책과 교류를 통해 여성과 약자들을 향한 수많은 폭력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내 안에 수많은 정보들이 들어오고, 그로 인한 분노가 있지만 자연스레 그러한 폭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지는 않는 거죠. 막상 나는 길거리에서 시비 거는 사람에게 대응할 수가 없거나, 직장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에 대응하지 못할 때... 그럴 때 위축되거나, ‘나 페미니스트인데 왜 이정도도 못 대응하지?’ 하는 자책도 이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앎’이 많아진다고 해서 당연하게 모두가 ‘제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또한 10여 년 전에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했을 때 숨통이 트이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20대 초반에 이 세상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분노와 무기력함에 질식할 것 같았던 그 때, 그래도 페미니스트 동지들과 모여서 몸훈련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밤거리를 활보하고, 뒤풀이하던 술집에서 만난 시비를 거는 아저씨들과 싸우며 작은 승리를 맛본 경험들이 숨을 쉴 틈을 내어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매 활동가는 그런 말을 했어요. 여성주의자들이 모두 자기방어훈련을 꼭 했으면 좋겠다고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넷. 반격의 묘미!
재밌게 몸 훈련을 하다가도 문득 ‘이런 훈련이 실제 상황에서 정말 도움이 될까?’라는 의구심이 마음 한 켠에 올라올 때가 있는데요. 자기방어 훈련을 하는 8주 안에 그런 마음을 싹 사라지게 해 준 두 번의 실전경험(?)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자기방어 훈련을 하던 중이었고, 나머지 한 번은 반려견 놀이터에서의 싸움이었어요.
자기방어훈련 중 쉬는 타이밍에 완전 무방비한 상태로 서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다른 참가자가 제 어깨를 잡아챘어요. 순식간에 몸을 돌리며 그 손을 쳐내고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엄지와 둘째 손가락 사이로 상대방의 목을 쳤죠. 제가 생각해도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이었어요. 켁켁거리면서 당황스러워 하는 적(?)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희열이 느껴졌습니다. 훗.
또 하루는 강아지를 데리고 반려견 놀이터에 갔다가 다른 견주와 말싸움이 붙었는데요. 말싸움 중에 갑자기 그 사람이 제 얼굴에 본인의 가슴팍을 들이밀고는 저를 깔아보며 위협을 하더라고요. 그 사람은 저보다 훨씬 키가 컸거든요. 순간 심장이 뛰고 두려움이 올라와 얼음이 되었지만, ‘아! 안전거리를 확보해야지!’란 생각이 들어 양 손을 들고 그 사람을 밀치며 그 사람과 저의 안전거리를 확보했습니다. 물론 배운 대로 하자면 제가 한 스텝 뒤로 가는 게 더 좋았겠지만 저는 상대를 미는 방법을 택했어요. 왜냐면 그 사람은 큰 키로 저를 제압하는 것 외에 아무 준비가 안 되어있더라고요. 턱을 치켜들고 절 위협하는 그 모습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너무도 몸이 오픈되어있는 거예요! 특히 목 울대치기는 나의 주특기인데 저렇게 턱을 치켜들고 있다니! 훗.
상대의 몸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이는 순간이었죠. 나를 얕보는 상대는 무서운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약점을 나에게 모두 오픈한 매우 취약한 상태이기도 하다는 걸 실전으로 체험했어요.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다섯. 자기방어자 정체성
7주차 워크샵에서 오매 활동가가 여성주의 ‘자기방어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그걸 듣는 순간, ‘아, 저것은 이제부터 나의 정체성이 되겠구나!’하는 직감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자기방어’가 기술이 아닌 나의 정체성이 되는 순간이었죠. 8주 차 마지막 시간에 돌아가면서 각자 '여성주의 자기방어자 선언'을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때 주온님이 아래의 글로 선언을 하셨는데 글이 제가 생각하는 여성주의 자기방어자 정체성을 잘 표현한 것 같아 허락(?)을 받고 이곳에 공유합니다. ^^
자기방어자인 나는 불꽃이 된다.
불의와 부정의와 폭력과 비겁한 공격에 맞서
함께 분노하고 밝게 비추는 불꽃이 된다.
자기방어자로서 나는 파도가 된다.
분노로 부러지지 않고 부드럽고 유연하게 큰 흐름을 이해하고
바다의 일부가 되는 파도가 된다.
그 무엇보다 자기방어자로서 나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고 반응하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나 자신이 된다.
- 참가자 주온님의 "나의 자기방어자 선언" -
덧. 셀프디펜스를 배울 수 있는 도장에 등록했어요. 첫 수업 날, 선생님이 펀치를 연습하는 제게 다가왔습니다. “혹시 복싱 배웠어요?” “네? 아뇨. 그런 거 배운 적 없는데요” 그러자 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닌데...뭔가 한 거 같은데...” 하면서 가셨어요. 전 그런 걸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 터라 ‘왜 그러지?’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신입 회원 분이 제게 “눈빛이 장난 아니에요.” 라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아하! 선생님이 다시 물어본다면 “아, 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한 여자에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그 뒤로는 안 물어보시더라고요 ^^;
‘감기와 오덕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이 있던데 ‘여성주의 자기방어자’의 넘치는 스피릿도 숨길 수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후훗
9월 8일(토)에 1박 2일 자기방어캠프가 열린다네요~ 곧 함께 갈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합니다. :) 여러분, 자기방어캠프에서 만나요~
<이 글은 [일상을 바꾸는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참가자 신율님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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