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일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페미니스트 아무 말 대잔치(이하 '페미말대잔치')> 15회차 모임이 진행되었습니다. <페미말대잔치>는 작년 1월부터 매월 꾸준하게 진행되어온 여성주의 수다모임이에요. 4월에는 담당자인 제가 헌법재판소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대응, 상근활동가 워크숍 등으로 정신이 없어 부득이 모임을 진행하지 못했어요. 서로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월초에 바로 일정을 잡고 모였습니다.
이번 모임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이 참여했어요. 이달부터 새로 참여하는 분도 있어서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처음에는 평소처럼 자유롭게 근황을 나누었습니다.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이슈에 관심을 가졌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저절로 여성주의 이슈에 관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모임 초기에 가장 주목 받은 주제는 역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었어요. 선고 당일 현장에서 있었던 일,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한 소감 등을 시작으로 '헌법불합치'의 의미, 앞으로의 법 개정 방향 및 쟁점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정의당의 아쉽기 그지 없는 개정안 발의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눴어요. 정의당 발의안이 왜 문제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실제 해외 사례와 전세계의 재생산권 운동 흐름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8시부터는 <차별에 맞서는 용기를 잇는 수다, 차별잇수다(이하 '차별잇수다')>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원래 <페미말대잔치>는 별도의 프로그램 없이 실컷 수다를 떠는 모임이지만, 이번 모임에서는 특별히 <차별잇수다>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미리 약속했거든요.
차별에 맞서는 용기를 잇는 수다, 차별잇수다!
있다! 차별 받은 경험이 있다. 평등을 향해 갈 동료를 만들고 싶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민주주의 활동가 그룹 ‘빠띠’가 함께하는 차별잇수다를 시작합니다.
[ 참여 방법 ]
3. 차별잇수다 이끔이 워크숍
4. 공유하기 #용기를잇는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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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잇수다>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민주주의활동가그룹 "빠띠"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캠페인이에요. 한국성폭력상담소도 오랫동안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참여해왔고, 지금은 전략조직팀으로 함께 하고 있어요. 차별이 무엇이며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회원소모임 참여자분들과도 더 소통하고 싶어서 이번 워크숍 진행를 제안드렸어요. 다들 흔쾌히 "좋다"고 해주셔서 기뻤습니다.
이끔이 역할을 맡은 저는 먼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차별잇수다>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고, 참여자들에게 활동지와 스티커를 한 세트씩 나눠드렸어요. 아직 메모지가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메모지를 나눠드리지 못했는데요. 다행히 활동지에 공간이 넉넉해서 워크숍 진행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우선 함께 매뉴얼을 보면서 참여자의 약속을 소리내어 읽고, 어떤 차별 사례가 있는지 예시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매뉴얼에 준비된 예시 사례는 누가 봐도 대놓고 차별이다! 라고 느낄 사례보다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조금은 알쏭달쏭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례 한 사례 읽을 때마다 제가 겪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오르더군요. 예를 들어서 저는 발이 크고 발볼도 넓은 편이어서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기가 너무 힘듭니다. 특히 어릴 때는 기성품 사이즈가 지금보다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늘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지 못하거나 주문제작을 해야 했어요. 신발가게 주인이 '무슨 여자애 발이 이렇게 크냐'고 중얼거리면 내심 부끄럽고 모욕감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신발을 사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사실상 남녀공용 운동화 밖에 신고 다니지 않아요.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본격적으로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우선 첫번째 순서로 각자 자신이 경험한 차별 사례를 나누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모임답게 주로 성차별, 성희롱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어요.
예를 들면 이삿짐센터 직원, 수리기사, 배달원 등등이 혼자 사는 여성에게 유독 무례하거나 부적절한 플러팅을 한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로서 분노하고 당당하게 문제제기하고 싶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상대가 자신의 집주소도 알고 있고 혼자 사는 사실도 다 알고 있는 점이 무섭고 불안하다는 고민도 나눴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여성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는데, 연령이 비교적 높은 참여자도 같은 경험을 적어주셨더라고요. 우리끼리 내린 결론은 이런 상황이 '남성 보호자가 없는 여성'에 대한 무시와 위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들은 흔히 '1층, 반지하에 살지 마라', '남성 구두와 속옷 등을 구비해놔라', '배달시킬 때 집에 남자친구가 있는 척 하라' 등과 같은 조언을 듣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혼자 사는 여성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그 해결책으로 어떤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참여자 한 분은 키(신장)에 따른 차별적 인식에 대한 경험을 말씀해주셨어요. 그 분은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다가 당사자의 키에 따라서 사람들의 태도가 굉장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요. 키가 큰 여성은 '네가 무슨 여자냐' 같은 말을 듣고, 키가 작은 여성/남성은 어린애처럼 여겨집니다.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되죠. 사회가 '적당하다'거나 '평범하다'고 말하는 기준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외모에 관한 억압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한 가지 기준만 어긋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기준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만 간신히 부정적인 시선을 피할 수 있죠. 너무 살이 쪄도 안 되고 너무 말라도 안 되고. 너무 민낯이어도 안 되고 너무 화장을 진하게 해도 안 되고, 너무 편한 옷을 입어도 안 되고 너무 격식있는 옷을 입어도 안 되고. 하지만 이런 기준은 명확하지도 않고 그때그때 다르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통제의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서로의 경험을 충분히 이야기 나눈 후에는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하겠어!"라고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 당시에 뾰족한 수가 없었던 상황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본들 딱히 기막힌 수가 떠오르지는 않았어요. 다음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야지, 그때와는 다르게 행동해야지, 스스로 다짐해보았지만 내심 막막한 느낌을 떨쳐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음 순서로는 롤링페이퍼처럼 서로 활동지를 교환하며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한 나의 느낌, 또 다른 해결 방법 제안 등을 쓰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지지, 응원, 위로, 연대, 함께 … 꿀팁!", "옆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사회에 변화가 필요한 일(인식, 법, 제도 등)"를 쓰는 칸도 함께 채웠어요. 상대가 갖고 있는 힘을 응원하고 믿어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마음 가는 대로 스티커를 붙여 활동지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참여자들이 써준 메시지를 읽으니 점점 용기가 생기고 연대할 수 있는 동료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와 소감을 나눈 후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렸어요. 그동안 지속되어온 차별금지법제정운동의 역사와 지금 준비하고 있는 법안 등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차별을 해소할 수 없으므로 우리 사회의 구조, 대중의 인식, 개개인의 일상이 함께 변화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이런 게 기대된다!"를 각자 작성하고 워크숍을 마쳤어요. 새로 오신 참여자 분께 "원래 우리 모임은 정말 자유롭게 수다만 떠는 모임인데……", "되게 쉽고 편한 모임인데 오늘만 뭔가 해야 할 일이 많은 거예요."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이제 끝!
공식적으로는 <페미말대잔치>를 마칠 시간이었지만, 참여자 중에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남아서 아쉬워하는 분이 있었어요. 집이 먼 참여자는 막차가 끊기기 전에 먼저 돌아가고, 남은 참여자끼리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워크숍도 좋았지만 그 이후에 나눈 대화도 굉장히 좋았어요! 바로 질 건강에 관한 이야기였거든요.
질에서 분비물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몸의 현상이고, 월경 여부나 건강 상태 등에 따라 성기에서 냄새가 나기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여성청결제, 질 세정제 등을 홍보·판매하면서, 여성의 성기는 뽀송뽀송(?)하고 향기(?)가 나야 한다는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에 여성들은 건강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분비물과 냄새조차 과도하게 자기검열하고 수치스러워하게 되었지요. 청결에 대한 강박 때문에 오히려 질 건강을 해치는 일도 흔합니다. 질 내부는 여러 미생물이 살고 있고 산성을 유지하면서 자정작용을 하는데, 염기성인 비누/바디워시/세정제나 중성인 물로 질 내부를 씻게 되면 오히려 좋은 분비물을 죽이고 질내 환경을 해친다고 해요.
이런 중요한 정보를 가르쳐주기는커녕 오히려 여성의 몸에 대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비싼 세정제를 팔아먹는 일부 산부인과의 행태를 함께 욕하기도 했는데요. 여성들이 산부인과에서 상처받는 경험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중 일부는 산부인과 자체의 문제(의료진의 태도, 비밀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 등)이지만 일부는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료진이 부당한 태도나 편견에 기반한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진료 과정에서 성기의 상태를 진단했을 뿐인데 그로 인해 당사자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왜 여성은 분비물이 많다거나 질에서 냄새가 난다는 말에 당당하게 "내 몸은 원래 그래"라거나 "질이 아파서 그래"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기를 불결하게 여기거나 수치스러움을 느끼는가 궁금증이 생겼어요. 혹시 여성의 몸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당사자인 여성도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관련된 자료로 자료집 <우리가 만드는 피임사전(건강과대안)>, 소책자 <혹시, 산부인과 가봤어?(한국여성민우회)>, 출판 서적 <질의응답:우리가 궁금했던 여성 성기의 모든 것(열린책들)> 등을 서로 추천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가 늦은 밤 모임을 마쳤어요.
다음 모임은 2019년 6월 6일(목) 오후 2시경에 모여 함께 퀴어영화제를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 후기는 본 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작성하였습니다.>
◆ 페미니스트 아무 말 대잔치게 참여하고 싶다면?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 로 다음과 같이 참여 신청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제목 : [페미말대잔치] 회원소모임 참여 신청 내용 : 이름/별칭, 연락처, 참여 동기
담당 활동가 앎이 연락처 및 참여의사 확인 후 오픈카톡 링크를 보내 초대해드립니다! 원하시는 경우 오픈카톡 링크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1회 시범 참여 하실 수 있는 찬스도 드려요~
※장난 치거나 시비 걸려고 들어오시는 분들이 있어서 오픈카톡 링크를 부득이 비공개로 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메일 보내주시면 1주일 이내로 전화 연락 및 이메일 답장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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