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오른 제주도 비행기에서, 우연히 여연 활동가 분을 만났습니다. 덕분에 엄청 빠르게 숙소에 도착해서 여유 있게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1일차_나를 알기, 활동가인 ‘나’는 누구인가? - LCSI 검사를 통해 본 ‘나’와 우리
워크샵에 가기 전,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두 가지 사전작업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가 LCSI 검사였고, 두 번째가 조직문화 및 활동가인 ‘나’에게 필요한 전반에 대한 설문조사였습니다. 서울에서 마친 LCSI 검사 결과를 토대로 강의하는 시간이 바로 1일차의 첫 번째 강의였습니다.
네 가지 성격유형 중 자기가 속한 유형대로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주도형/분석형/표출형/우호형 중 저는 주도형, 함께한 활동가 신아는 우호형이 나왔습니다.
이런 류의 유형검사를 별로 신뢰하는 편은 아니어서 풀이해주신 성격유형 결과가 엄청나게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함께 모인 사람들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작업이 재미있었습니다. 주로 듣는 말에 대한 허심탄회한 이야기 - 냉정하다, 너무 혼자서 일을 하려고 한다 등 – 를 하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이스브레이킹 할 수 있는 시간이라 더욱 즐거웠습니다.
나와 비슷한 성향인 사람들끼리 모여 성향분석을 마친 이후에는 활동가로서의 ‘나’에 대해 조별로 모여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년차 이하의 활동가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고민 중 비슷한 게 많았습니다. 1) 구조를 보는 눈을 기르고 싶다 2) 재생산 가능한 활동을 하고 싶다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데요, 저희 조에서는 1) 활동가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2) 대안으로 단체 내 노조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역이나 단체의 규모에 따라 저마다의 상황에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1일차_글로벌 성평등 규범과 여성운동방법론
저녁식사 이후 곧바로 시작된 이번 강의는 조영숙 한국여성단체연합 부설 국제연대센터 소장님이 해 주셨습니다. 베이징행동강령을 비롯한 국제적 협약을 한국이 얼마나 이행했는가, 그리고 여성단체가 얼마나 국제적 흐름을 이해하고 따라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운동의 국제적 흐름을 얼마나 캐치하고 있는지, 원활하게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지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강의였습니다. 이번 3월, 상담소의 두 활동가가 UN 여성지위위원회에 다녀와서 다양한 컨퍼런스에 참여한 후기를 풀어 주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운동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 방식과 다르게 어떤 영향력을 사회에 미쳤는지에 대한 평가 등을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었는데요, 상담소의 현 위치와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2일차_근현대 한국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
이번 강의는 권김현영 선생님이 해 주셨습니다. 타이틀은 근현대사였지만 2000년대 중반, 정확히는 2004년 이후의 한국 사회의 흐름에 대해 강의해 주셨습니다. 인상깊은 이야기가 참 많았는데요, 다양한 법률 제정으로 ‘평등’이 완성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각이 대중여성 사이에 존재했다는 점, 때문에 여성단체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평행선을 그리는 저울에 자꾸만 추가적인 ‘혜택’을 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처럼 여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강박적 형태의 평등주의가 어떻게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의 운동을 위축시켰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2004년 유영철 사건 당시 ‘묻지마 살인’, 즉 이유 없는 쾌락살인에서 오는 공포를 가리기 위해 여성에 대한 원한을 동기로 설정하고 여성을 미워하게 하는 데에 온 힘을 다한 경찰청장이 2016년이 되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되려 ‘묻지마 살인’으로 정의하는 딜레마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묻지마 살인’이란 곧 전쟁이나 테러에 준하는 사건인데, 여성혐오를 가리기 위해 국가의 실책을 인정한 2016년의 사례가 12년 전과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했습니다.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믿는 이 시대에, 페미니스트 정치가 가야할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중요한 한 축으로 안전담론이 포함될 것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폭력에 노출되는 수많은 사례가 매일같이 뉴스에 오르내리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단순히 치안의 안전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페미니스트의 안전감각이라는 권김현영 선생님의 말이 오래 남습니다.
2일차_성평등한 조직문화, 누가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니까
이번 프로그램은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만든 워크샵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요, 첫 번째 날부터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살짝 나왔던 만큼 활동가들의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저희 조는 다양한 지역, 다양한 규모, 다양한 연차의 활동가들이 섞여 있어 저마다 조직의 상황이 조금씩 달랐는데요, 더 나은 조직문화를 꿈꾼다는 점은 동일했습니다. 각자 지금까지 여성단체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있었던 긍정적인 일과 부정적일 일 두 가지 씩을 쓰고, 어떤 일인지, 왜 썼는지 등을 공유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해 보니 조직문화와 관련 없다고 생각한 일을 썼는데도 자연스럽게 조직의 분위기가 나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는 아직 3개월차밖에 되지 않은 활동가라 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른 활동가들의 조직 분위기와 상담소의 분위기를 비교하는 것도 꽤 재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각색한 사연 세 가지의 문제점, 해결방법, 논의해야할 점 등을 다같이 토론하고, 그 중 한 가지 사연을 골라 해결방안까지 시연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희 조는 세 번째 사연인 “뒤풀이 자리에서 이사와 회원에 의한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그리고 대표가 제대로 활동가를 보호해주지 못했을 때”를 골랐는데요, 완벽하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큰 얼개만 짜 두고 즉흥적으로 상황을 풀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각각의 사연이 1일차에서 언급한 설문조사 내용을 각색하여 만든 것이라 그런지 이야기를 할 때 조금 더 우리 단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상담소에는 ‘이 공간의 약속’을 만들어서 활동가 뿐만 아니라 상담소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 평등한 조직문화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완벽하게 지켜지지는 않지만요. 인권침해에 관한 내부 규정도 있어서 관련 규정이 없는 활동가들이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규정의 존재만으로 안심하지 않고 나부터 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경각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일차_한국여성단체연합 운동사
여성단체연합의 김영순 대표님이 마지막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현장감 있는 강의였는데요, 여성단체연합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한국사회의 맥락, 한국사회와 여성단체연합이 조응하는 방식 등으로 설명해 주셔서 이해가 잘 되었던 강의였습니다. 무엇보다 1985년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한국여성대회 슬로건을 쭉 보여주어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여성단체들이 그 해에 집중했던 운동이 무엇인지, 운동의 흐름 등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시간관계성 모든 PPT를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언제 봐도 멋있는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슬로건과 함께 강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2일차_뒷풀이
운동사 강의가 끝나고 바로 재정님과 써니님이 진행하는 뒷풀이가 있었습니다. 여연에서 준비한 골든벨 형식 퀴즈가 있었는데요, 이틀동안 강의에서 들은 내용과 넌센스 퀴즈가 문제에 섞여있었습니다. 아쉽게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저와 신아 모두 2등을 차지해 상품인 티셔츠를 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티셔츠가 탐났는데, 고마워요 여연!
퀴즈가 끝나고, 한국여성의전화 나눔 활동가의 주도로 즉석 노래방이 꾸려졌습니다. 지친 활동가들에게 흥을 심어준 나눔 활동가와 용기있게 노래해준 다른 활동가분들까지 소극적으로 어깨를 들썩였는데요, 상담소 책임연구원 파이의 애창곡 <딸들아 일어나라>가 나왔을 때에는 흥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신아 둘 다 신이 나서 폭주기관차처럼 민중가요를 내리 불렀답니다.
공식적인 뒤풀이가 끝나고 나서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활동가들끼리 모여 2차를 진행했는데요, 프로그램 때 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일차_제주 4.3의 이해
프로그램 마지막 날은 지역여성운동을 탐방하는 시간으로 짜여졌습니다. ‘제주 4.3의 이해’를 주제로 반나절 동안 4.3과 관련된 주요 장소들과 4.3 평화공원에 다녀왔습니다.
4.3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1954년 4·3이 종료되면서 폐허가 된 마을의 복구와 정착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4·3이 제주공동체에 남긴 후유증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출처: 제주4.3평화재단(https://jeju43peace.or.kr/) |
첫 번째 방문 장소는 북촌마을이었습니다. 북촌마을은 4.3. 당시 최대의 피해마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민들을 모아두고 학살한 북촌초등학교, 죽은 아기들의 무덤인 너븐숭이 애기무덤, 4.3을 고발한 소설 현기영의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옴팡밭과 기념비를 방문하여 해설사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은 얼핏 보기에 평범한 풀과 돌길처럼 보였지만 군데군데 인형들이 놓여있었고 붉은흙으로 덮여있는 옴팡밭에는 <순이삼촌>의 구절들을 비석으로 눕혀(학살 당시의 시체를 형상화)져 있었습니다. 북촌초등학교에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있어서 다른 초등학교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곳곳들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었는데, 평화롭고 때로는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걷는 모든 곳이 4.3의 현장이었을 것이기에 무거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설사분의 말에 따르면 지금의 많은 관광지들은 학살 장소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이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과 진상조사가 시작되는 등 수면위로 올라오기 전까지 제사도 숨어서 지내고 명확히 부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취업상의 불이익이 있기도 하고, 현재까지도 무장했던 피해자들은 다른 피해자들처럼 평화공원의 위패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다는 점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3학살 당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안가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산과 굴에 숨어 있었던 사람들(그러다가 학살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백개의 마을이 불타 없어졌는데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마을이 가진 이야기들, 역사들 또한 사라졌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이 만들어온 터는 무엇이었을까 안타까운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이었는가는 4.3공원에 건조하게 새겨진 위패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위패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성씨, 돌림자를 가진 이름들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족 친족들이 4.3.으로 인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살아남은 유족들과 시민단체는 지속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해왔습니다.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되었고, 2003년 정부의 진상보고서 발표에 이어서 10월 31일 전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합니다. 얼마전 2019년 4월 3일에는 71년만에 군경의 공식사과가 있었습니다. 사실 평화기념관을 나오는 길에는, 평화나 화해라는 말이 누구를 위한 말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4.3 공원을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상담소의 두 활동가는 전기 자전거를 빌려 해안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비바람이 심해서 우려도 되었지만 6시간 끝에 목표지점에 도착했을때는 큰 성취감이 있었고 라이딩 끝에 만난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습니다. 마침 전날인 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아이다호)였고, 강남역 3주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활동가들은 이 무지개가 상징하는 것이 강간죄 개정과 차별금지법 제정이기 바랐습니다.
제주를 더 알고 동료 활동가들과 꽉 채운 시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장을 만든 여성연합 활동가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P.S. 식사
이번 워크샵의 식사는 특별했습니다. 바로 ALL 비건식이었기 때문이었는데요, 매번 디폴트가 비건이 아닌 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상황을 한 번 뒤집어보자는 의미에서 비건을 디폴트 값으로 두고 전체 식사를 비건식으로 준비해보셨다고 합니다.
사실 상담소에서도 점심밥모임을 하고 있는데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대부분의 메뉴가 비건식으로 준비되곤 합니다. 그래서 상담소에서 먹는 식사의 고급버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3일 내내 비건식을 먹으니까 오히려 몸이 더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다른 워크샵에서도 비건식을 접할 기회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신아, 사무국 닻별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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