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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

[후기] "망국정치에 맞서는 페미니스트 릴레이 말하기대회"에서 상담소 활동가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추위와 따뜻함 사이에서 흔들리는 어느 가을 10월 셋째주 토요일!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개최한 릴레이 말하기 대회 <반동을 저지하며 전진>이 열렸습니다.

 

무려 4시부터 9시까지 장장 다섯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망국정치'에 맞서 릴레이 말하기를 하는 자리였는데요, 모두가 다 모이는 자리에 상담소가 빠질 수 없죠! 성문화운동팀의 유랑과, 여성주의상담팀의 호랑이 발언자로 참여하였습니다.

 

유랑과 호랑은 6시반에 발언을 예약하고, 말하기대회 장소로 항하였고 단호한 붓글씨가 적힌 종이와 매서운 바람이 맞이하였습니다. (참! 경진활동가도 함께하였어요)

 

유랑은 2024년 여성폭력 예산안이 감축된 것을 강하게 규탄하는 발언을, 호랑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우울과 용기에 대해서 발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들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발언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사람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기 시작하고... 유랑과 호랑은 참가자들의 몸살과 감기를 걱정하며 발언을 대폭 줄여 잘 마쳤습니다.

 

 

 

날리는 머리카락과 살폿이 감은 눈에서 매서운 바람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렇지만! 규탄하고 한탄하고 개탄하고 싶은 것이 많은 요즈음에, 이렇게 말하기 대회의 자리가 열려서 이야기를 내뱉고 들을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소중한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발언 전문을 아래에 살폿이 실어봅니다.

 

 

 

<유랑 발언문> 

안녕하세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활동가입니다. 그저께 대통령이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성폭력, 아동학대, 가정폭력, 스토킹과 같이 약자를 상대로 하는 범죄는 절대 용납해선 안 된다”라는 말을 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타당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가 났습니다. 2024년 여성가족부의 예산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여성가족부는 이 예산안이 “약자 복지”에 집중투자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산안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은 무려 142억 원이 삭감되었습니다. 삭감된 항목에는 가정폭력 피해자 치료회복 프로그램, 여성폭력피해자 의료지원 비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치료회복 프로그램은 집단 상담, 자조모임 등 피해자가 피해 이후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활동을 하는 사업입니다. 의료지원은 피해자가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정신과 등의 병원, 심리상담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현장에서는 피해지원 예산 부족을 늘 체감하는데도 정부는 ‘입소율 저조’, ‘사업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예산을 감축한 것입니다. 가정폭력, 성폭력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피해자를 지원하는 비용 외에 여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인식개선 및 홍보 사업도 모두 삭감되었습니다. 효율을 생각한다면, 근본적으로 여성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인식 개선과 교육에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할텐데 말입니다. 여성폭력 통합지원센터를 만들겠다고 가정폭력 상담소와 보호시설 운영비도 삭감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지역별 인구를 반영하지 않은 채 상담소 인원을 감축하려 하고, 이미 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하고 있는 디지털성폭력 사업을 갑자기 통합지원센터로 이동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존 상담소에서 지금까지 지원을 받고 있는 피해자들은 내년부터 다른 기관으로 옮겨가야 하는 걸까요?

 

고용노동부의 고용평등상담실 예산 전액 삭감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용평등상담실은 직장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경험하거나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여성노동자를 상담 지원하던 곳입니다. 직장 내에서, 노동부 처리과정에서 부당함을 경험한 여성노동자들이 찾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부터 지금까지 직장 내 성희롱 지원 경험과 역량을 쌓아오던 고용평등상담실이 이제 없어진다고 합니다. 고용노동부 8개 지청에서 1명을 고용해 상담을하겠다는데 이렇게 적은 인력이 충분한 감수성과 역량을 가지고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를 잘 지원할 수있을까요?

 

정부는 대체 “약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체계를 시시각각 무력화시키고 있는데 어디에 “약자복지”가 있다는 말일까요? 경찰의 날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것은 “방검장구, 저위험권총과 같은 신형 장구를 신속히 보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에게 있어 ‘약자’란, 신체적, 물리적 힘이 약한 사람, 그래서 더 큰 힘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나 여성폭력은 단순히 물리적 힘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구조와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폭력, 가정폭력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면, 실적과 효율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여성폭력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집행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또, 여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체계를 더욱 두텁게 하는 예산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호랑 발언문>

안녕하세요. 한국성폭력상담소 호랑입니다. 상담소 활동가이긴 하지만, 저는 오늘 조금은 개인적인 그러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자리에 나왔습니다. 얼마전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친구가 여러가지 이슈 대응을 하고 있지만 사실상 나아지는 것은 없고, 내일의 사회는 더 암울할 것만 같은 현실에 갑갑하다며 우울증이 다시 걸릴것만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날은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이 깎인 것에 대해 상담소에서 논의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슬로건은 “반동을 저지하며 전진”이지만, 전진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울해했던 친구에게 용기를 불어넣게 위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번 정부 들어서 우울한 순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여성가족부의 폐지 계획이 공표되었을 때, 친원전을 선언했을 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정부가 동의하였을 때, 법무부가 비동의간음죄에 반대하였을때,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을 때. 서울시 직장내성희롱성폭력 예방센터와 성평등도서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최근에는 앞서 유랑 활동가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여성폭력 피해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대책없는 통폐합 소식을 들었을 때 분노와 빡침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활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지난 몇년간 미투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속에 이뤄놓은 소소한 성취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회의와 우울감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페미니스트 여러분 우리의 피에 흐르는 페미니스트의 DNA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초심을 생각해보십시요. 온갖 여성비하 발언과 성차별과 혐오발언을 뚫고도 페미니스트가 된 당신의 잠재력을 잊지 마세요. 우울하고 절망하더라도 춤을추며 싸울 수 있는 우리 내면의 에너지를 잊지 말아주세요. 모기가 사라지고 은행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은행을 밟고나면 그 냄새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의 향기는 은행의 냄새보다 더 강하고 독하게 이어질 것입니다. 이 추운 날씨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든 분들이 덜우울하고 더 씩씩하게 내일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