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짱
대학 후배인 부부가 아기를 출산한 지 100일쯤 됐다.
언제 한 번 놀러가마 놀러가마 하다가 지난주에 가게 됐다.
빈 손으로 갈 수는 없고 아기 옷이나 몇 벌 사서 갔다.
딸이라고 하니 내딴에는 예쁜 프릴이 달린 옷으로 가서 가져갔다.
사온 아기 옷을 보더니 애기 아빠가 풋~하고 웃으며 하는 말이
"이제, 우리 OO이 까만 바지 생겼네. 까만 바지도 생겨서 좋겠다~"하는 것이었다.
까만 바지라면 누구나 한벌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서 의아해진 내가
"어? 까만 바지가 없어?"하고 물어봤더니
"다들 분홍색옷만 사와서 가지고 있는 바지들이 다 분홍색이예요. 심지어는 흰 바지도 별로 없다니까요. 암튼 선배는 역시 좀 다르네요."라며 웃었다.
옆에서 애기 엄마도 웃으면서 거들었다.
"그러게요. 너무 분홍색만 사오면 그렇다니까요. 남들도 좀 알아야되는데. 하하."
나중에 아기를 목욕시키고 왔는데도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쳐다보니
애기 엄마가 웃으며
"옷 안 갈아입힌 거 같죠? 이거 아까랑 다른 옷이예요. 다 분홍색이라서"하고 말한다.
아기 옷을 고르면서 꼭 분홍색을 안 사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지만,
"남자아기는 파란색, 여자아기는 분홍색"이라는 성별구분이 거슬리기도 해서
사실 분홍색 옷으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홍색이 예쁘면 분홍색 사는 거 뭐 어때?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분홍색 일색인 여자 아기옷을 보니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명절에 다른 후배가 나한테 와서 물어본 적이 있다.
조카가 남자애 하나, 여자애 하나 있는데 명절마다 선물 사 주기가 너무 고민된다는 것이다.
남자애한테는 로봇, 자동차를 사주고, 여자애한테는 곰인형, 소꿉놀이를 사주는 게 싫어서
다른 선물을 고르다 보니 자꾸 동화책만 사주게 된다는 것이다.
동화책만 갖다주니 조카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카가 없는지라, "그래, 그냥 여자애한테도 자동차 사주면 되잖아"하고 웃고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뭐라 딱히 답이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남자다움'/'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애를 키운다는 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분홍색' 자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여자애한테 분홍색 옷을 선물하는 게 무슨 문제일까?
그러나 '분홍색' 옷이 '여자다움'의 기표가 되고, 남자애가 '분홍색'을 입으면 놀림받는 상황이 되면
이건 그저 '분홍색' 옷을 입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를 넘어서서 '차별/강요'의 문제가 된다.
다른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보너스>
같은 옷이라도 남자 아기 옷은 달라요. 요지경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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