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에게 치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해 받은 사실 조차 친구에게 속 시원하게 꺼내놓지 못하고, 부모에게 맘 편히 위로 받을 수도 없는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치유란 과연 뭘까? 혹시 우리가 그들에게 치유라는 것을 권할 때 우리들의 말 속에 ‘너만 힘들뿐이니 빨리 용서하고 잊어버려라’라는 몰이해를 담고 있지는 않았나.
우리는 반드시 치유를 권하기에 앞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난 진짜 그의 목소리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치유에 필요한 건 경험을 재해석하는 힘이다.
세상의 통념 속에 갇혀 자신의 경험을 범죄피해로 인식하지 못하고 ‘내가 좀 어리석어서’, ‘내가 처신을 잘 못해서’, ‘나 때문에’라는 말들로 채워간다면 결코 성폭력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가해자에 대한 진정한 분노를 표출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치유를 시작 할 수 있다.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먹잇감이 되도록 자신을 던져두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는
무시무시한 [피해자 유발론]은 그대로 피해자에게 수용되어 그들의 입을 막는다.
어렵사리 자신의 피해를 스피크아웃 하더라도 피해자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은 ‘내가 왜 막지 못했을 까’ 이다.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내게 묻는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하지 마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님 지금처럼 괴로운 마음이 덜했을까?
그러나 끝내 답을 찾을 수는 없다.
문제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범죄행동’ 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혹시라도 치유를 말하고 싶다면,
일단 모든 비난을 접어둔 체 그 사람을 한번 응시해 보자.
그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 앞으로 어떤 말을 듣고 싶은지,
그것이 시작점이다.
2009. 6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 대회
Lee 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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