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마음을 다스리고 바뀌면 세상은 또 별 문제 없다는 듯 돌아가는 것이 속상하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사건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든 삶을 다 엉켜놓는 것 같다.
어쩔 때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다. 심리 상담도, 법적 처벌도, 조직에 징계를 요구하는 것도 다 힘들고 버겁기만 하다. 지원자도 마찬가지이다.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어서 그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뽑아야 할지 모르겠는 사건들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생존자 중 많은 분들이 ‘그 사람 때문에 또 피해를 보는 다른 여성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엄연한 범죄행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조직사회에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러주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은 여자라서 참아만 왔던 나를 위해서' 힘들지만 자신의 성폭력 피해사실을 드러내고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예전에는 지하철 아무렇게나 다리를 벌리고 앉는 남자 옆에서 그저 내 다리를 꼬아가며 불편함을 감수했지만, 지금은 다리 좀 모으라고 말한다. 더 이상은 나에게 오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가만 넘어가지 않겠다.
지금은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부터가 어렵고, 남들에게나 일어날 것 만 같던 일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야 성별불평등을 느낀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이제 여자들은 선거투표도 할 수 있고, 대학교를 다닐 수 있고, 수업시간에 남자들 처럼 손을 들어 교사에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고, 법관이 되거나 가정주부로 사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나에게는 믿음이 있다. 성폭력이 없는 세상이 올 것 이라는 믿음이다.
나는 이 꿈을 생존자들과 함께 꿈꾼다고 생각한다.
힘든 일임을 알면서도 계속 해 나가야만 하는,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에겐 있다.
생존자든 지원자든 지지 않고 이 땅에 살아 숨 쉬며
내가 여기서 당신들이 잘 하나 안하나 지켜 보겠소 할 수 있는 이유.
성폭력 없는 세상은 오고 있다.
내가 약한 여자라서 밤길이 무섭고, 순종적인 여자라서 타인의 기분에 맞춰주어야 해야 하고, 가임기의 여자라서 무조건 애를 낳아야 하는 그런 세상은 우리들이 살 세상이 아니다.
leem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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