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리더십, 낯설고도 익숙한
글로벌 리더십, 파워 리더십, 소셜 리더십……. 각종 리더십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새롭게 제안하는 리더십은 ‘피해자 리더십’이다. 피해자 리더십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순간 어쩐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무리를 다스리거나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라는 리더십의 사전적 의미와 수동적이거나 나약하다고만 여겨지는 피해자의 이미지가 상충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 리더십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나면, 이 낯선 단어가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달은 익숙한 경험을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J. Howard Miller, "We Can Do It"
‘피해자 리더십’은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피해 경험자가 ‘독립적·주체적’으로 발휘해야 하는 힘을 말한다. 피해생존자의 주체성, 독립성, 역량 강화 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용어로, 가부장제 사회가 흔히 가지는 오해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 제인웨이는 『약한 자의 권력』에서 약한 자가 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권력의 형태 중 하나는 ‘자신에 관한 정의를 권력자가 강요하는 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
20년 동안 성폭력 피해생존자, 사건지원자, 상담원, 반성폭력 운동 활동가들과 함께한 상담소가 목격한 것은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가진 엄청난 생존력이었으며, 그 힘이 불러일으킨 크고 작은 활약들이었다. 그런 활약을 가능하게 만든 주체적이고 성찰적이며 창조적인 힘이 바로 피해자 리더십이다. 성폭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경험자로서의 피해자, 자기가 겪은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직접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피해자,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건 해결 지도를 그리고 목표를 설정하고 한계를 점검하는 피해자, 자신이 겪은 폭력을 통해 사회를 성찰하고 변혁하는 힘을 가진 피해자가 내뿜는 강렬한 힘 말이다.
‘피해자 리더십’이라는 개념은 한 가지 유형으로 정형화된 피해자 리더십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며, 그 안에는 개별 피해자의 다양한 리더십이 숨어 있다.
사회에도 다양한 리더가 존재하듯이, 피해자 중에도 자신의 목표를 강력하게 피력하는 피해자, 주변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호소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피해자, 자신이 가진 자원을 영리하게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피해자 등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매스미디어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력한’ 피해자조차 자신의 사건 안에서 나름대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을 것은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피해자상에 갇히지 말고 나만의 장점과 한계를 파악하여 성폭력 사건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리더십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개소 20주년을 맞이하여 피해자 리더십에 대한 그간의 고민을 담아 『보통의 경험: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DIY 가이드』를 출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전략은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언제라도 나일 수밖에 없으므로, 인생에서 일어난 일 중 하나인 성폭력 사건을 해결할 주인공도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피해자가 리더십을 발휘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우고 효과적인 목표를 선택하여 주변 자원과 지지 체계를 활용한다면, 성폭력 사건을 맨 처음 원했던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과연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피해자가 주체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법정에서 가해자에게 큰 형량이 선고되었다고 해서 피해자의 마음이 마냥 흡족하기만 할까.
피해자 리더십은 성폭력 사건의 표면적인 결과뿐만 아니라, 그 후 계속되는 피해자의 삶과 치유의 여정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성폭력 사건 전후로 다져진 피해자 리더십은 피해생존자의 삶 전반에 걸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피해자 리더십으로 충만한 피해생존자들이 예리하고 멋진 전략으로 이 단어의 빈 곳을 속속들이 채워주기를 간절히 기대하며 건투를 빈다.
- 벨 훅스,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모티브북, 2010, 151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이슈를 말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문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 센스 넘치게 주목하는 tip! tip! tip! (0) | 2011.06.10 |
---|---|
남녀평등신호등, 남녀평등 내세워도 반갑지 않은 이유 (0) | 2011.05.11 |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정말? (3) | 2011.03.15 |
[백해무익한 성폭력 예방 10계명?!] ② 생존자가 말해주는 레알 성폭력 예방과 대처 10계명! (5) | 2011.03.03 |
[백해무익한 성폭력 예방 10계명?!] ① 검사가 알려주는 성폭력 예방 10계명? (1) | 2011.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