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CCTV 설치가 부쩍 늘었다. CCTV가 부족한 경찰 인력과 장비를 보완하여 범죄를 예방하고 증거를 확보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됨에 따라, 지난 2002년 서울시 강남구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설치가 확산되어 왔다. 범죄 현장에서 범인은 물론 범행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촬영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CCTV를 정확하게 분석하면 범죄 용의자를 보다 쉽고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데 무엇보다도 큰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만 있는 곳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로 진술이 엇갈리고 특별한 증거가 없을 때에는 CCTV가 증거자료로 많이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CCTV의 분석과정은 여전히 수사, 공판 담당자의 판단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이들의 인식이나 태도에 따라 분석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근 우리 상담소에서 지원한 몇 가지 사례는 CCTV의 분석결과가 범죄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여 무척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경우다.
사례 1
첫 번째 사례는 술에 만취한 A씨를 가해자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강간한 사건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집 엘리베이터 CCTV를 확인한 결과, 피해자 A씨가 비틀거리지 않아서 만취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가해자가 자신의 집으로 이동할 때 피해자 A씨의 친구들이 전화하여 데리고 오라고 하였지만, 가해자는 피해자를 이미 집으로 보냈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이후에는 휴대폰을 꺼놓은 채 피해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성폭력을 자행한 것으로 보인다.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1심 재판에서 피해자 A씨의 친구 3명이 증인으로 나섰고, 피해자와의 통화에서 가해자가 미안하다고 말한 증거도 제출되었다. 그리고 대질심문조사 당시에 가해자는 무릎을 꿇고 잘했다고 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해자는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고 하면서 CCTV에 촬영된 모습이 비틀거리지도 않으니 취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함께 목격한 친구들의 증언과 피해자의 증언, 가해자가 여러 차례 사과하고 합의를 요구한 것 등 성폭력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황증거가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CCTV에 나타난 피해자의 모습에만 초점을 맞춰 판단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재판부의 판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사례2
두 번째 사례는 만취한 C씨가 직장상사로부터 모텔에서 강간을 겪은 사건이다. 가해자는 위계를 이용하여 피해자 C씨를 강제추행하고 강간하였지만, 결국 검찰단계에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항고를 제기하여 어렵게 수사가 제기되어 피해자 C씨와 함께 검찰청에 동행했을 때, 수사담당자는 확보한 CCTV의 영상을 보여주며 만취한 것 같지 않고 연인이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냐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사람마다 술에 취한 모습은 다를 수 있고, 나 역시 필름이 끊긴 적이 있는 경험자로서 만취했지만 주변사람들은 내가 술에 취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하게 행동한다고 하였다는 얘기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후 피해자 C씨와 상담할 때 CCTV 영상에 대해 물었더니, C씨는 만취하면 매우 당황하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면서, 그 영상에서 자기가 종종걸음으로 따라 가는 모습은 자신의 평소 걸음걸이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후 검찰에 피해자 C씨의 진정서와 우리 상담소의 의견서를 제출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는 어렵게 기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재판부의 판단을 남겨두고 있어 불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CCTV가 진실을 말하는가?
형법상 성폭력에 관련된 법에서 ‘강간/강제추행’과 ‘준강간/준강제추행’은 다르다. 강간/강제추행의 입증은 ‘폭행․협박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고, 준강간/준강제추행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성폭력을 자행한 것을 의미한다. 앞의 두 사건은 피해자가 비틀거리지도 가해자에게 업혀서 가는 것도 아니고 멀쩡히 피해자 자신의 발로 아파트와 모텔에 따라 들어갔으므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라고 볼 수 없어 ‘준강간’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결과다.
성폭력은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약물, 술, 잠에 취하여 피해자가 성적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간음이나 추행은 명백히 성폭력이다. 성폭력 사건에서는 증거나 증인이 없을 경우 사건전후의 정황을 가지고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앞의 두 사건은 그러한 정황을 설명할 수 있는 사실관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피해자의 외관상 모습’만을 가지고 단선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진실 여부 판단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몫
피해자의 피해 경험은 다 다르다. 피해를 입는 양상도, 또 피해 이후에 겪는 후유증도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흔히들 성폭력은 어두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에 의해 끌려가서 겪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실제 상담사례에서 이런 피해유형은 매우 드물다. 오히려 친족성폭력, 직장내 성폭력, 데이트 성폭력처럼 가까이서 알고 지내던 이에게 겪는 성폭력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렇듯 아는 사람 사이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명확한 증거나 목격자가 없는 경우 피해자는 늘 화간이 아니냐는 적대적인 질문 앞에서 스스로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소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추궁당하기도 한다.
위의 두 사례에서 엇갈리는 진술이나 주변인의 증언을 배제한 채, CCTV 영상에 나타난 피해자의 모습이 자신이 생각하는 만취한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성폭력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폭력을 둘러싼 뿌리깊은 통념- “그건 강간이 아니라 화간일 것이다” -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수사․공판담당자가 성폭력을 처벌하는 현행법의 입법취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충분히 비틀거리지 않는다’는 영상판독에 기대어 자신의 통념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심신 상태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를 진정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아야 한다. 이럴 때에만 피해자들이 우리사회의 법의 공정함을 믿고 적극으로 가해자를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펼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될 때에만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신뢰가 보장되는 사회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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