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팀의 '여성 청취자의 비키니 시위에 대한 발언'으로 시작된 '나는꼼수다 논란'을 주제로
각각 집담회를 개최했습니다.
일명 '나꼼수 비키니'사건은
SNS와 언론보도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이번 논란으로 가시화된 많은 이슈들은
'여성' 또는 '인권'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안에서 과제로 남았습니다.
특히 '나는 꼼수다' 팀 '해명' 과정의 여성주의 진영에 대한 발언들은,
2012년 한 해 동안 두 번의 선거를 겪으며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그 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정치인들 사이에서
'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 인권 이슈가 깊이있게 다뤄지는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갖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성폭력과 성별 문제에서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같은 이야기 같지만, 무수히 다른 결의 차이를 가진 이야기들을 판단하는 힘을 키우는 한 해로 만들어봤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을 바라본 전 상담소 활동가의 글을 블로깅합니다.
함께 읽어봐주세요*^^*
오래전에 나와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이 세상에 ‘메롱’하는 심정으로 도발적인 옷도 입고, 순결이데올로기에 연연하지 않는 행동도 하고 싶지만, 그런 나를 이죽거리며 쳐다볼 남자들의 시선 때문에 망설여져요.” 벌써 20년쯤 전 얘기인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나꼼수 비키니 논쟁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가 참으로 ‘진보적인’ 후배가 아닌가,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처음부터 나꼼수가 싫었다. 물론 초기에 다른 곳에서 얻기 힘든 BBK 관련한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데에 귀가 솔깃했다. 그런데 중간중간 들려오는 그들만의 낄낄거림이 계속 집중을 방해했다. 이죽거림이 주는 익숙한 불쾌감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사실’은 줄어들고 ‘낄낄거림’이 늘어났다. 계속 청취할 이유가 사라지면서 나꼼수는 자연스레 나로부터 멀어졌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지만, 꾸준한 청취자도 아닌데 내 의견을 공론의 장에 내놓아도 될까 망설여져 입다물고 살았다.
그러다 일명 비키니 발언 사건이 터졌다. 이미 그들의 이죽거림에 포함되어 있던 유의 발언이어서 별다른 당황스러움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다른 마초들과는 달리 ‘경솔했다’, ‘사과한다’는 정도의 쇼맨십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하는 실낱같은 신뢰마저 가질 수 없어 마음이 좀 쓰리기는 하다.
‘왜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비냐’며 ‘큰 일 하는데 별 것 아닌 일로 분열을 일으키냐’는 비난은 외면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직도 이 수준이라니, 기운이 빠진다. 차라리 “그들의 젠더감수성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역할이 통째로 다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 않냐. 인정할 건 인정해주자”고 주장했다면 좋았을걸. 그 정도였다면 이 사회의 시시함에 혀를 차기는 했어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욕감퇴제’, ‘비키니 사진’ 따위의 발언은 촌스럽기 짝이 없다. 남성들의 섹스중심적 세계관은 어떤 이슈에나 관통한다. 그들의 농담에 나타난 ‘교도소->성행위 불가->성욕 조절의 어려움’ 식의 단선적인 사고 흐름은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인간은 상대방에게 성적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항상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만 재현되는 여성 이미지는 너무나 후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나 토론은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하기에도 식상하다. 적어도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이 문제는 이제 졸업 좀 해주면 좋겠다. 아직도 이 수준이어서야 언제 진도 나가겠나.
한 여성의 비키니 시위 사진을 둘러싼 발언은 괘씸하다. 시위 방식에 대한 의견차이야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에는 정봉주 전 의원의 수감을 조롱하고 낙후시키는 통쾌함이 있다. 그런데 나꼼수는 권력에 한방 먹이는 ‘메롱’의 속시원함을 한순간에 더럽고 불쾌한 기분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떻게 감히 그녀의 시위를 성욕 위안용으로 전용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꼼수를 옹호한다면서 ‘그저 웃자고 한 소리’라니! 남을 농락하는 것이 가벼운 유머가 되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이 모든 낙후함과 폭력성이 한데 모여,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성적 엄숙주의로 포장하는 기만이 여전히 먹히고 있다. 엄숙한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을 이해 못하는 꼰대들에게 이제는 사회가 변했다고 일장 훈계하는 자들. 그들은 성차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통찰을 이해하는 것이 아직도 어려운가 보다. "진짜 문제는 욕망을 가진 자연인이면서도 상대를 정치적 동지로 이해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등한 인간으로 감정이입 할 수 있느냐다."라는 김어준의 해명(?)이 궤변에 불과한 것은, 페어 플레이의 전제인 ‘대등함’에 대한 통찰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멋대로 왜곡해온 가부장제의 역사를 낙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고민과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페어 플레이는 서로 동등할 때만 가능하다. 여성의 차별과 폭력 피해의 역사를 통찰하지 않는 가진 자들의 발랄함은 그들의 오만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윤상(한국성폭력상담소 前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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