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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수원 살인 사건, 여성폭력 문제의 '사소함'을 드러내다

 수원 살인 사건, 여성폭력의 ‘사소함’ 수면 위로 드러내다


 지난 1일, 경기도 수원에서 귀가하던 여성을 납치, 성폭력 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3일 후 처음 언론보도 된 이래 연이어 드러난 경찰의 부실대응은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첫 보도 당시에는 수사에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발표했던 경찰이 피해 여성의 112 신고 전화를 받고도 상황의 긴급성을 인식하거나 피해자 소재지 파악을 위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신고 접수 경찰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과 엉뚱한 곳에서의 탐색으로 시간을 허비했고, 그동안 피해자는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는 사실마저 알려졌다. 더욱이 경찰측에서 사건을 은폐·조작하려 한 정황이 112 신고센터 녹취록, CCTV 판독 등을 통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이번 사건은 경찰의 여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불러온 참사다. 경찰은 ‘성폭력을 당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신고내용에 “부부싸움 같은데……?”라고 반응했고, 해당 사건을 ‘단순 성폭행’ 사건으로 판단하여 보고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신고 내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가정폭력은 부부 사이 갈등으로 인한 부부싸움이자 ‘집안일’이 아니며, 성폭력은 성적인 사건이나 개인과 개인의 권리 충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수 십년 간 여성운동은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폭력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임을 우리 사회에 알렸고, 그 결과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폭력 사건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은 뿌리 깊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경찰조차 피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신호를 무시해 처참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여전히 이러한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12.04.10. 수원살인사건 여성긴급행동


 지난 10일 여성단체는 안일하게 대처한 경찰을 규탄하고 국가 책임을 촉구하는 ‘수원살인사건 여성긴급행동’ 거리행진을 열었다. 참여 단체들이 “안일하게 대처해온 국가가 살인자”라며 이번 사건은 여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과 여성폭력 피해자의 진실성을 의심해 온 우리사회 관행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폭력에 대한 수사·재판관의 통념


 여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 현장에서는 여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 수사·사법기관의 인식과 대응 변화를 오랜 시간 문제제기 한 바 있어, 이번 사건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2010년 여성가족부의 전국가정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현재 부부폭력률이 53.8%에 달하지만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8.3%에 불과하다. 경찰 신고 후 조치내용을 보면 ‘출동은 했으나 집안일이니 서로 잘 해결하라며 돌아감’이라고 응답한 비율 17.7%를 포함해 별다른 조치를 받지 못한 경험이 68.2%로 과반을 넘는다. 경찰이 여전히 가정폭력을 별 것 아닌 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또한 정부는 지난해 ‘가정폭력방지 종합대책’을 발표, 경찰에게 긴급임시조치권을 부여해 가정폭력 가해자를 피해자와 분리 혹은 격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현재도 법원의 결정에 따라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명령 등을 할 수 있는 임시조치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긴급임시조치권을 부여했다고 해서 출동한 경찰이 가정폭력 사건을 심각한 범죄행위로 인지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지는 미지수다.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도 많은 피해자가 고소 후 수사·재판관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성인 피해자는 더 심하다. 심한 폭력이나 협박이 없는 사건의 경우, 피해자를 의심하고 비난하는 태도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아는 사이라면 사건을 꾸며낸 것이 아닌지 의심 받고, 왜 충분히 저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밖에도 사건과 무관한 성경험 여부나 사생활 등에 대해 질문을 받는 등 수사·재판관으로부터의 2차 피해 호소는 끊이지 않는다. 가해자의 고소 취하 종용과 협박에도 강력한 조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수사관이 나서서 합의를 권유하는 사례도 있다. 최근 몇 년 간 아동성폭력을 위한 법안은 우후죽순으로 쏟아졌지만 성인 대상 성폭력 피해자들은 아직도 가해자뿐 아니라 사회적 통념의 벽에 갖혀 있는 수사·재판 담당자들과 싸우는 중이다.


 여성폭력 근절을 어렵게 만드는 수사·사법기관의 태도는 여성폭력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통념과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단체가 가정폭력 가해자의 ‘긴급구속’을 요구하고 성폭력 범죄의 친고죄 조항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13년 경력의 경찰관이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을 단지 해당 경찰관의 잘못이라고만 여기고 넘어갈 수 없는 이유다.



 경찰, 여성폭력에 대한 근본적 태도 변화 약속해야



ⓒ 경향신문 [원본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091040241&code=940100]

 13일 열린 전국 지휘관 회의에서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은 경찰의 ‘무성의와 무능함’을 사죄하며 경찰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 향상, 열악한 피해자 지원체계에 대한 개선 노력이 포함됐는지는 의문이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여성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예방과 근절을 위한 어떠한 시스템 정비도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시스템을 관리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폭력에 대한 경찰 인식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감수성 정비가 우선돼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처럼 특정 사건이 이슈화될 때마다 공분을 잠재우기 위해 관련 대책을 짜깁기식으로 다급하게 내놓아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경찰이 진정으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고자 한다면 여성폭력 근절을 위한 현행 체계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실질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실효성 확보를 위한 종합적인 고민과 준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