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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젠더정책과 성평등, 그리고 4.11 총선

젠더정책과 성평등, 그리고 4.11 총선

 

 

여성운동계는 그간 여성과 성소수자의 차별과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젠더정책의 힘 있는 추진과 성평등 구현을 위해 여성뿐만 아니라 젠더의식을 가진 정치인이 충원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해왔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가족과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여성의 역할과 발전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일상생활방식과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정치적 생활과 정책 결정과정에서 배제되어 왔"으나 "국내적 및 국제적으로 모든 수준에서 정책결정에 완전하고 동등하게 참여하여야만 여성이 평등 발전 평화달성과 같은 목표에 대한 기여를 할 수 있"고 "이러한 목표들이 달성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보장되려면 젠더관점이 결정적이며 여성의 완전한 참여는 여성에 대한 권력 부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전체 245명 중 남성 국회의원 수가 231명이고, 여성은 14명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 18대 국회의 현실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위험요소이다. 민주주의는 오직 정치적 정책 결정이 여성과 남성에 의해 공유되고 양성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할 때만이 진정하고 역동적인 의미와 지속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합의다.

공천 초반 각 당은 19대 총선에서 여성공천을 대폭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지역구 여성후보 최종 공천률은 새누리당 7%, 민주통합당 10%, 자유선진당 6%, 통합진보당 15%로, 공직선거법의 권고 비율 30%에 턱없이 못 미쳤으며, 15%, 20% 의무공천을 당헌당규에 각 각 명시하고 있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결국 당헌, 당규를 어긴 셈이 되었다.

이러한 '여성 대표성의 위기'는 각 정당이 젠더관점을 실천할 의지가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초래되었다. 어떤 적극적 조치도 조직적인 실행의지와 구성원의 관점 변화 없이 목표했던 결과를 얻기 쉽지 않다. 일정비율의 여성할당 방침을 두고 여성운동을 하기 위해 정당을 만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성당원들을 향해 각 정당은 성평등 사회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여성 및 성소수자 대표성이 왜 필수적인지를 설득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지역구 후보자 간 경선과정에서도 정치신인, 특히 여성정치신인의 진입장벽이 한없이 높은 현실정치구도에서 당선 가능한 지역에 여성을 공천하고 같은 지역구에 여성 후보들 간 경쟁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지난 20여 년 동안 주장해온 여성정치세력화운동의 기본도 지키지 않았다.

한국 정당의 젠더관점 실천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 보자. 통합진보당이 전교조 위원장 시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수습과정에서 피해당사자의 의견과 문제제기를 무시하고 조직 보위를 위해 사건처리를 진행했다고 비판받고 있는 인사를 비례대표의 당선권 내에 공천한 것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여대생을 상대로 "아나운서 되려면 다줘야"한다는 등의 성희롱ㆍ성적비하발언으로 사회적 공분을 샀던 국회의원이 반성은커녕 또 무소속으로 지역구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는 이 마당에, 가해자나 2차 가해 당사자도 아니고 조직의 수장으로서 2차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행위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안은 소위 진보를 표방한다는 정당에서조차 공천 과정에서 성폭력과 관련된 과거의 경력이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며 대부분의 정당이 이번 총선의 후보공천과정에서 수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성평등 관점을 견지하지 못했음을 알게 해준다.

또 다른 사례. 민주통합당의 청년비례대표 공모에 참여했던 한 성소수자운동가가 면접과정에서 심사위원으로부터 결혼 여부를 질문 받았다고 한다. 선거홍보 영상에서 그는 외국의 성소수자 정치인을 거론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국회의원이 필요하다고 지지를 호소했던 터였다. 그는 동성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냐고 심사위원들에게 반문했다고 한다. 후에 이 정당의 관계자는 성소수자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정당을 기대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며, '인권동네'의 철없음을 에둘러 나무랐다. 이 사례만 보더라도 젠더문제에 있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 생물학적 성의 숫자에 갇히지 않은 젠더관점의 공천을 현 정당들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만이 젠더관점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16대 국회 5.9%, 17대 국회 13.0%, 18대 국회 13.7%(2011년 10월 현재, 의원 승계 포함 15.1%) 라는 여성의원의 양적인 증가가 여성관련 법안과 관련된 의제를 제기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며, 남성 의원의 성 인지적 의정활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최근의 연구결과가 의미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소수자나 여성의 권리를 대변함에 있어 생물학적 여성의 숫자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젠더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섹스(sex)의 범주로만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구분과 배제, 개발과 착취, 독점과 폭력을 되풀이했던 명예남성인 여성정치인들의 존재는 생물학적 여성임이 여성주의적인 가치 실현을보증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계급의식이 비대칭적이라는 주장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성별의식 역시 비대칭적이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을 자임하는 남성 진보세력들조차도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 여성과 소수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은 종종 계급이나 정권교체의 당위나 조직의 안위를 성평등 의식의 앞자리에 놓고 갈등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성이지만, 한국의 UNDP(Uniet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의 정치, 경제 분야의 여성 참여 정도를 지표화한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 GEM) 2009년 결과를 보면, 109개 국가 중 61위에 불과하다. 정치적 대표성, 전문 관리직, 경제력, 그리고 소득에 있어서 성 격차가 매우 큰 국가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여성정책 및 관련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는 하나 제도와 현실, 제도와 의식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 젠더정치를 실천할 필요성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졸업연설을 할 때 인용했다던 앤 셰이브너의 시 한 구절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로서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유권자의 실천이다. 유권자의 정치는 비례대표 1번에 전원여성공천이라는 정당 전략의 속내를 꿰뚫어 보며 투표에 임하는 것이고, 투표 후에는 빈곤문제 해결, 차별금지법 제정, 성소수자 인권증진, 성폭력 근절, 통합적 인권교육 제도화, 성주류화 안착 등의 실질적인 젠더정책이 실현되도록 정당의 실천을 추동해내는 것일 게다.

 

 

                  ( 이 글은 지난 4월 3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입니다. 기사 보러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