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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여성이 배제된 피임약 정책, 당사자들에게 결정권 줘야

 

매년 7월 1일부터 7일은 여성주간이다. 올해도 전국 곳곳에서 여성과 성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여성주간이 17년째 개최되는 동안 여성의 삶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사회·문화·경제 각 분야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나 교육수준은 높아졌지만 여성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임금 또한 남성의 62% 수준에 머무는 등 현실을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삶이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최근 몇년간 낙태 단속 강화, 생명공학기술의 발달, 다이어트 및 성형 산업의 급속한 성장 흐름까지 더해져 여성들은 자신의 몸과 건강, 나아가 삶에 대한 결정도 스스로 내리기 어려운 현실에 처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열악한 여성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지난 6월 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이 발표한 의약품 재분류안에 경구용 사전피임약과 사후긴급피임약이 재분류 대상으로 포함되면서 불거진 '피임약 논란'이다.

 

여성의 몸은 국가의 관리 대상?

 

식약청은 국내 허가된 모든 완제 의약품 3만9254개 품목에 대한 재분류를 실시하였다. 그중에 사전·사후피임약이 전면 재분류되면서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식약청의 재분류안에 따르면 그동안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사전경구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고,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의사의 처방을 통해 구입할 수 있었던 사후응급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다. 발표 이후 이를 둘러싸고 의사와 약사, 종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논쟁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피임약의 부작용 여부와 오남용, 낙태 증가에 대한 우려, 성문란 조장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되는 논의에서 정작 피임약 복용의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약에 의한 부작용이나 오남용, 피임 실패로 인한 원치 않는 임신이나 낙태, 출산 모두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정작 이에 대한 정책 수립과정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는 빠져 있다.

 

  
▲ 산아제한 홍보 포스터 과거 정부는 산아제한을 위해 여성의 피임과 낙태를 권장했다.
ⓒ 보건복지부

 

사실, 정부가 임신이나 출산, 낙태, 피임 등과 같이 여성의 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책을 여성을 배재한 채 추진한 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국가는 인구 정책 필요에 따라 여성의 몸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통제·관리해왔다.

 

산아제한이 필요했던 6,70년대에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가, 저출산이 위기라는 최근에는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피임이나 임신, 출산에 대한 정책 역시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했다. 산아 제한 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 정부는 여성들에게 경구피임약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피임과 낙태를 적극 권장했지만, 최근에는 정반대로 낙태시술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40년 가까이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경구피임약도 의사에 처방을 통해 구입하도록 하겠다고 정책을 백팔십도 바꾸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국가의 관리와 통제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결정권과 통제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 불평등한 이성애 관계 속에서 피임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한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아이를 낳아 기르기 어려운 열악한 사회경제적 여건 때문에, 결혼제도 밖의 임신을 비난받아야 할 행동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 언제 누구의 아이를 몇이나 출산할 것인지를 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국가가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임신·출산과 관련된 재생산 정책을 경제나 발전의 논리에 따라 바꾸며 여성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여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정책들

 

식약청의 피임약 재분류안 발표 이후, 여성들은 혼란스럽다. 의사, 약사, 정책 담당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여성의 안전과 건강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다. 이번 재분류안이 의약계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정이 아닌지에 대한 의혹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누구도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지난 4일 국회의원 남윤인순 의원실과 '여성의결정권과건강권을위한피임약정책촉구공동행동'이 여성의 결정권과 건강권 측면에서 본 피임약 재분류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피임약 재분류, 왜 '여성'이 결정의 주체여야 하는가>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여성의 몸에 대한 정책 수립과정에서 반드시 당사자인 여성들이 결정의 주체로 등장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특히 그간 의사와 약사들이 논쟁을 펼쳐온 피임약의 안전성과 부작용뿐 아니라, 당사자인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중심으로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피임약 정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되었다.

 

  
4일 오후 국회도서관에서 남윤인순 의원실과 '여성의 결정권과 건강권을 위한 피임약 정책 촉구 긴급행동' 주최로 피임약 재분류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 박소희

 

이날 발제자로 나선 추혜인 살림의료생협 주치의(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수십 년간 여성들이 복용해온 경구피임약의 부작용이 점점 줄어들고 안전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구피임약에 대한 여성의 접근성을 낮추는 것이 정당한가를 따졌다. 그는 "우리 사회가 피임약의 효능과 유의점 등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역시 이번 식약청의 의약품 재분류 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빠진 것을 문제제기 하며 "피임정책 수립을 위해 40년이나 피임약을 복용해온 한국 여성들의 부작용 및 오남용에 대한 자료, 피임실태에 대한 구체적 자료와 근거가 제시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이사는 "모든 이에게 피임약에 대한 동등한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실효성 있는 피임교육이나 산부인과 등의 인프라 확보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홍익대학교 법과대학의 이인영 교수도 "식약청의 피임약 재분류안이 여성의 기본적 인권침해 가능성이 있으며, 피임약 정책은 개인의 피임권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도록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피임약에 대한 다양한 여성 주체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황지성 소장은 "피임 정책을 비롯한 재생산 정책에 장애 여성에 대한 고려가 있었는가"를 질문하며 "장애 여성에게 적절한 피임 방안에 대한 연구나 실질적인 보완책 마련 없이 피임약 비용을 높이고 접근성을 낮추는 사전 경구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다면 장애 여성이 위험에 놓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수수'도  피임약 복용 당사자가 성인 여성들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수수 활동가는 "청소년의 성관계가 금기시되는 한국사회에서 경구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은 (청소년에게) 피임약을 접근 불가능한 약품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를 표했다.

 

피임약 정책, 여성들이 결정해야

 

토론회 참여자들이 지적한대로 실효성 있는 피임약 정책 수립을 위해 정부는 부작용이나 해외 사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40년간 피임약을 복용해온 한국 여성들의 피임실태(피임율, 피임방법, 복용기간 및 주기, 부작용, 오남용 실태, 피임에 대한 인식 등)를 제시하고 연령과 소득, 장애, 혼인 여부 등에 따른 피임약 접근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실효성 있는 피임 교육을 실시하고, 피임약의 효능 및 부작용이 우려되는 경우 복약지도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누구나 안전하고 편리하게 피임약을 구입하고 복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여성의 몸은 여성이 결정한다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결정의 주체는 여성 자신이다.

                     ⓒ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의 몸과 삶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 자신에게 있다. 특히 임신이나 출산은 물론 이와 관련한 피임이나 낙태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당사자인 여성이 자신의 건강상태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여 조절하고 결정할 일이다.

 

국가의 역할은 여성의 결정을 방해하고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의 내용에 따라 자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충분한 의학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즉, 여성의 몸에 대한 정책은 각종 이해관계, 경제적 논리의 경합이 아니라 여성의 건강과 삶의 질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진정 여성의 건강과 삶을 위한다면, 여성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자기 몸과 삶의 주체로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 글은 [여성 몸 장악한 '이놈', 정말 고약하네] 라는 제목으로 2012년 7월 9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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