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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

29기 성폭력전문상담원 기본교육 첫 번째 후기

29기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을 마치고

 

 

 

  한창 더울 여름 성수기인 8월 하순인데 요즘 들어 비가 자주 내린다. 자박자박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서 한참을 듣고 있다가 노트북을 연다. 올여름 내내 휴가도 없이 부천 집에서 합정동을 오가던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이 끝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교육 참가 후기를 써서 보내기로 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네. 에고, 미루지 말았어야 했는데, 슬쩍 후회가 된다. 괜히 쓴다고 했나? 그래도 나에게 뜻깊었던 이번 교육 참여경험을 정리해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을 다잡고 앉는다.

 

 

☞ 교육기간 동안 상담소 출입문에 붙어있던 안내문

 

 

  나는 올해 지천명을 넘기고 다섯 번째 해를 맞는 늦깎이 학생이다. 1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운명처럼 서불대 상담대학원에 진학 했다. 3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여성주의 타로에 푹 빠져들면서 반년을 고민하다가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거다. 영성치유의 도구로서 타로는 나를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하고, 여성, 영성, 치유라는 개념이 내 삶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여성주의 상담공부와 함께 구체적인 현장 활동을 하려는 생각에 상담소 교육에 참여하게 됐다.

 

 

열 번째 강의, '자기방어훈련의 이해 및 실습'

 

 

 강의 첫날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남성 참가자가 세 명이나 되다니!! 아주 반가웠다. 성폭력 가해자들의 심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가해자 교육을 여성주의로 무장한 남성 상담자가 진행한다면 더 좋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어서 더 반가웠던 거 같다. 참가자들의 연령도 다양하고, 참여 동기도 다채롭다. 다양한 사람들이 3주간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무사히 수료까지 하게 되어서 더 감회가 새롭다.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춘천에서 첫 기차를 타고 오시는 분도 계시고, 만화작업을 하시는 분,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시는 분, 상담공부를 하는 학부생, 대학원생들, 곳곳에서 상담지원활동을 하는 활동가들, 출산을 앞둔 만삭의 임산부까지 모두 함께 탄식과 공분을 나누며 신뢰가 깊어지던 시간이었다. 각각의 참여 동기는 달랐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되어갈수록 각자의 지향이나 관심이 드러나고 개인이 가지고 있던 관심사에 여성주의라는 관점이 더해지면서 점점 더 튼튼한 구조물로 완성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한 번째 강의, '성폭력상담소의 역할 및 지원 체계'

 

 

 나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뜻깊었던 교육시간이었노라고 고백해야겠다. 하루 이틀 프로그램이 열릴수록 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전의 기억들, 상처들이 건드려지고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나는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니면서 1세대 여성운동을 경험했던 세대다. 학부에서 여성주의 써클 활동을 학과 공부보다 열심히 했었고 결국 써클로 졸업을 했지만 생업은 여성주의와는 무관한 채 살아왔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엄마가 됐고, 현장을 지원하는 후원자로 남았지만 일상에서 드러나는 통념에 저항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삼십 년이란 세월의 공백은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만감이 교차하던 시간이었다. 삼십 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여성운동의 뿌리를 든든히 지켜온 현장의 많은 활동가의 모습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열악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현장을 꿋꿋하게 지켜온 여러 운동단체와 개인들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한세대가 흐르는 시간 동안 여성운동의 역사와 이론체계도 훨씬 확장되었고 탄탄하게 발전하고 있어서 매우 감격스러웠다.

 

 

 

☞ 강의가 끝나고 쌓여있는 교재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침해당했던 경험을 드러내고 치유하는 계기를 만났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의 경험을 반추하며 그것이 성폭력이란 인식조차도 하지 못했던, 자기 결정권을 침해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많이 놀라웠다. 아동 성폭력이나 친족 간 성폭력 등 유형별 피해 사례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에는 깊이 눌러뒀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이 수치스럽고 아픈 기억들이 툭툭 튀어 올라왔다. 수업을 들으며 울컥울컥 가슴이 메기도 하고, 어느 날은 건드려진 기억을 수습하느라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는 중에 눈물이 쏟아져 내려서 한참을 울다 들어왔던 적도 있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는 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보다 더 끔찍한 건 그런 일이 한 세대가 지나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요즘의 사건 사고를 보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다양화된다는 점 아니던가?.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하게 진화하고 있는 강간문화와 여성 혐오범죄의 적나라한 모습을 목격하면서 참담해지는 마음에 내내 힘들기도 했다.

 

 

수료식에서 앞으로 어떤 지원자가 될지, 서로 무엇을 함께할지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 교육을 통해서 나는 희망을 본다. 여성운동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는 안도감이다. 일만 년의 세월 동안 일상적이던 여성과 약자에 대한 폭력이 이제는 더 이상 장막 뒤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일상이 아니라고 자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난다는 건 언제나 반갑다. 개인적으로 밀쳐두지 않고 나서서 목소리 내고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멋진 3~4세대 페미니스트들뿐만 아니라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개인들이 많아진다는 것도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삶을 통해 경험하고 가치관으로 정립한 것들을 상담과 여성주의 관점으로 다시 통합하는 시간으로서 앞으로의 실천과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나 또한 누군가가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조력할 수 있는 따뜻한 우군이 되고 싶다.

 

 

 수료식날, 화이팅을 외치며! 

 

 

ps: 종강할 때도 미처 감사인사를 드리지 못했고 왔는데 이 지면을 빌어서나마 늦었지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늘 따뜻하게 맞아주신 상담소 활동가들, 열심히 강의해 주신 강사진 여러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침마다 빵이며 과일이며 든든하게 차려졌던 간식까지도, 무엇하나 소홀함 없이 챙겨주신 여러분들이 계셔서 무사히 35명 전원수료라는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 고맙습니다.

 

 

 

2017.8.25. 부천 성주산 끝자락에서 나무 김은영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