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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를 말하다

[연쇄성폭력살인사건논평] 익숙한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질문하자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2009. 2. 5. 10:12


 

우리에게 익숙한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질문하자

 

 

여성 연쇄 성폭력 살인 사건에 대한 피의자가 지난 1월 24일 검거되고 수사 내용이 노출되면서부터 이 사건에 대해 매일 새로운 뉴스 및 기사를 접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여 피의자의 유년 시절과 가족 관계, 범행 동기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다.


이 사건은 그 끔찍함으로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에게 낯선 종류의 사건은 아니다.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여성 성폭력 살인 사건은 매번 범행의 끔찍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성폭력 살인 사건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을 통해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반응 역시 비슷하게 반복된다. 그것은 ‘밤길이 무섭다. 밤에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 택시가 무서워서 마음대로 탈 수 없다’는 여성들의 공포이다. 범행 동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뜨겁고, 언론에서 쏟아내는 그 이유 또한 가지가지이다. ‘비가 오는 수요일에 범행을 한다.’, ‘흰옷을 입은 여자들은 범행 대상이 된다.’ ‘애인에게 실연당한 후 여자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아내가 죽은 후 여자들을 보면 살인 충동을 느꼈다.’라는 등의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은 많은 여성들에게 밤길에 대한 무한대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범행 동기’로 유통된다. 이러한 범행 동기를 알았다고 한들, 범행을 막을 길이 없으므로 특정 범죄인에 대한 공포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공포로 확대된다.


하지만 피의자가 연쇄적으로 여러 여성을 성폭력,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싸이코패스’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해가 발생했을 때 적절한 수사를 통해 가해자를 검거했다면 연쇄적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수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통제 할 수 없는 ‘싸이코패스’가 여성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했다는 식의 언론 보도는 미비한 경찰 수사에 대한 변명으로 비치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강간,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 이 사회의 여성들은 거대한 무기력한 집단으로 판단된다. 신체적으로 무기력하기 때문에 남성에게 취약하고, 연쇄살인범이 대부분 남성이기에 당연히 살인범에게도 취약하다. 따라서 어두운 장소는 안 가는 것이 좋고,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 해결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대한 공포에 압도된 여성들은 늘 ‘강간당할 수 있는 여성 성기’로 환원된다. 무기력함과 공포가 유포되며,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은 사라지고 다만 ‘무기력함과 공포’에 압도된 여성 집단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여성의 성이 사회적으로 위험하다는 이해는, 성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소한 자유(여성의 권리로 인정되어온 교육권, 성적 자기결정권, 이동권 등)는 희생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이 여성연쇄살인사건과 그에 대한 언론 보도가 갖는 부정적 효과 중 하나이다.


상당수의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며, 이번 사건 피의자의 사진과 가족관계 등을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조성되고 있는 여성의 성(폭력)에 대해 끝도 없이 유포되고 있는 공포를 목도하면서, 그리고 그 공포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다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왜 대부분의 연쇄 성폭력 및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여성인가? 왜 특정인의 반사회성이 하필이면 여성에 대한 분노와 혐오, 살인 충동으로 이어지는가?


그 이유는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 취약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들의 신체적 물리력과 외부 공격에 대한 대응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범죄자, 피해자, 우리 대부분은 여성들을 ‘쉬운 공격 대상’이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범죄자는 쉽게 굴복할 것이라 기대하며 여성을 공격하고, 피해 여성 역시 극도의 공포에 압도되어 공격에 대한 대응을 시도하기 어렵다. 이것은 그 인과관계를 따지기 어려운 성폭력 사건의 결과이자 원인이다. 여성의 신체적 취약함과 무기력은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공공기관의 교육에서, 연약하고 의존적인 여성 신체가 아름답다고 광고하는 미디어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각인된다. 이 모든 것은 넓게 보아,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무기력감을 만들어낸다.


둘째. 왜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살인 사건에 대한 해법으로, 여성들의 신체적 능력을 적극 향상시키려는 사회적 노력이 제시되지 않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해법으로 현재 주되게 제시되는 것은 가해자에 대해 국민들이 합의한 사법권을 발동하여 처벌하는 것이다. 이 사법권의 범위와 방법에 대한 논의는 피의자에 대한 인권을 중심으로 현재 많은 논쟁이 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살인이 여성의 취약한 신체에서 기인한다고 여긴다면, 왜 여성 스스로의 방어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첫 번째의 해법으로 제시되지 않는가? 스스로 취약하다고 여기는 피해자와, 그런 믿음을 공유한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은, 여성들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지 않도록 훈련하고 교육하고, 홍보하는 것이다. 더불어 힘이 있고 방어력을 지닌 여성 신체가 개그프로그램의 ‘웃긴 소재’로만 비춰지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성찰해야할 것이다.


2004년 유영철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 많은 여성들은 유영철이라는 범죄자와 더불어 성폭력 사건으로 대두되는 이 사회의 공포 정치를 비판하며 ‘달빛시위’라는 이름으로 모여 가두 시위를 열었다. 2004년 이후로 달빛시위는 현재까지 매 여름마다 열리고 있다. 달빛 시위의 캐치프레이즈는 ‘여성들도 밤길을 걸을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서, 그 자리에 모인 달빛 시위대는 성폭력 사건으로 환기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성통제’가 아니라 ‘여성을 성폭력에 취약하게 만드는 성폭력에 대한 통념의 부당함’임을 주장해왔다. 현재 연쇄 성폭력 사건을 둘러싸고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대신하여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예방을 위한 공익적 논의가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논의의 시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여성은 취약하며 자기 방어력이 없기 때문에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믿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과 그 생각을 실현하는 개개인의, 사회적 실천은 현재의 ‘공포를 방치하는 것’보다 훨씬 공익적일 것이다.


위험한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에 취약한 여성들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폭력은 여성들에게 반격할 수 없고, 성적 피해는 벗어나기 힘든 상처라는 사회적 상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변화는 더디게 오지만, 시작하지 않는다면 성폭력에 대한 익숙한 공포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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